[프랑스 교환학생기] 49. 시내 탐방
나는 일상이 지겨워져 돈을 써야만 하겠다는, 혹은 이놈의 자본주의 시장이 내놓는 새로운 물건들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시내로 나간다. 시내란 곳은 동네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여있고, 새로운 물건들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맛있는 음식들도 가장 많이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홀로 시내 마실을 꽤 자주 나갔다. 우선 갈리아에서 시내인 'Homme de Fer(옴드페흐, 번역하면 철인이라는 뜻의 역 이름)'까지 걸어서도 1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그러니 나는 틈만 나면 시내에 나갔고 혼자서 이런저런 세상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시내에 대한 내 첫인상은 명품 부티크였다. 스트라스부르 첫날, 트램을 타면서 바라봤던 밤의 명품 부티크들이 내게 매우 인상 깊었다. 아무 곳에나 입점하지 않는다는 에르메스가 몇 개의 층에 걸쳐 있었고, 이를 마주 보고 있던 루이뷔통 매장도 이에 질세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패딩 차림인 나도 집에서 십 여분 거리에 있어 부티크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을 해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한 번도 들어가진 않았다. 에르메스에서 제일 싼 물건도 사지 못할 터인데 들어가서 무엇하나. 하지만 명품을 구매하진 않았더라도 바깥에서 매장과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구경하는 일은 내 안목을 높여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스트라스부르에 당도하고 아마 가장 먼저 했던 학업적인(?) 일은 시내 ‘끌레베흐’ 서점에 가서 프랑스어 교재를 구입한 일이다. 프랑스어 수업 첫날 교수님께서 어떤 책을 사 오라고 설명해주셨고, 어느 서점에 가면 된다고 설명해주셨는데 나는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해 어안이 벙벙한 채로 헤매고 있었다. 다행히 그 수업에 내가 스트라스부르 첫날 만났던 중국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참 인상 좋던 남자 중국인 친구가 내게 약도까지 그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무사히 서점에 갈 수 있었다.
그 서점에서는 예기치 못했던 반가운 친구를 만나게 된다. 나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미술과 디자인 섹션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건축 서적을 보다가 우리 대학교의 건물 사진을 떡 하니 마주한 것이다. 먼 땅에 나와 나의 뿌리와 관련된 아주 티끌만 한 것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마치 대단한 우연과 운명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이날 이 사진을 찍어서 학교 페이스북에 올려버리고 만다.
옴드페흐역에선 Fnac 백화점과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을 만날 수 있다. 두 백화점 모두 간간히 구경하긴 했는데, 별 다른 특색은 없었고, 마카롱 외에는 딱히 무언가를 구매한 적은 없다. 종종 향수 구경은 즐겨했다. 향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내 방앗간은 세포라였다. 이때 당시 한국에 세포라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라 한국인들이 세포라에 더욱 미쳐있을 때였다. 지방시 뷰티나, 어반 디케이 등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제품들이 모두 있어서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간다. 나도 언제 이런 화장품을 다 보겠냐 싶어서 시내에 나가기만 하면 세포라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고 구매도 했다. 세포라의 기나긴 한쪽 벽면이 전체가 모두 향수 코너인 덕에 코가 마비될 때까지 시향을 했던 기억도 난다.
모노프리라는 마트도 꽤 자주 갔다. 모노프리에서만 살 수 있는 PB상품들이 있기 때문. 모노프리에서 파는 티라미수 디저트를 좋아해서 자주 사갔다. 본마망 쨈과 타르트 그 외 과자류들도 잔뜩 사곤 했다. 특히 본마망 라인의 과자들이 포장도 예쁘기도 하고 프랑스 감성이 듬뿍 담겼는데,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까먹으면서 차와 곁들이기 딱 좋다. 이 외에도 프랑스는 식료품이 풍부한 국가라 마트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시내에 있는 H&M과 자라는 가난한 유학생의 친구나 마찬가지다. 저렴한 가격에 트렌디한 옷을 구매할 수 있다. 글로벌 브랜드인 만큼 한국에도 있어서 친근한 느낌마저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철 입고 버려야 하는 옷들이 태반이긴 하다만, 그래도 저렴하게 많이 살 수 있는 행위가 주는 만족감을 생각해보면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했던 브랜드는 COS. 코스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난 이 브랜드를 알지도 못했는데 하염없어 거리를 구경하다 샵 분위기가 깔끔하고 세련되어 이끌리듯 들어갔다. 특히 남자 손님들이 많았는데, 모두 멋쟁이들이었다. 옷을 잘 입는 손님들이 많은 매장에 있으면 나까지 멋쟁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이때부터 나는 이런 브랜드들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코스에서는 지금까지도 잘 입고 있는 검은색 롱코트를 큰 할인폭에 구매했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더블 롱코트인데, 소재가 튼튼하고 유행을 타지 않을 디자인이라 아직까지도 여기저기 잘 입고 있다. 이때 샀을 때는 길이가 길고 품도 넉넉한 편이라 너무 커 보이진 않나 싶었는데, 오히려 지금 보니 오버핏이 더 멋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내 쇼핑의 마무리를 폴 빵집에서 할 때가 종종 있었다. 폴은 다른 동네 빵집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돈 썼다는 기분이 내고 싶을 때, 예쁜 빵집에서 예쁜 빵을 사고 싶을 때 들리면 딱 좋은 곳이었다. 모든 프랑스 가게가 그렇듯 폴도 길거리에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손님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놨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빵과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멋을 내고 외출을 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스타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얀색 복슬복슬한 퍼 코트에 맨다리를 드러내며 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를 낀 채 스트라스부르 거리를 활보하던 여자분이 정말 인상 깊었더랬다. 이런 멋쟁이들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스트라스부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