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환학생기] 60. 프라하1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5일 만에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 이번 여행지는 동유럽. 프라하, 부다페스트, 빈. 아직 여독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아 여행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한국인 언니와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로라인의 심야버스를 타고 프라하까지 가기로 했다. 밤 12시에 타서 아침 7시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독일을 거쳐 프라하로 가게 된다. 버스에서 불편하게 앉아서 가려니 조금 힘들었지만 잠시 눈을 붙였다 뜨니 프라하에 도착해있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면적은 서울의 2/3 정도에 인구는 130만 명에 달한다. 동유럽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화폐부터 환전해야 한다. 유로만 쓰다가 코루나를 쓰려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려야 한다. 화폐단위도 부쩍 커진다. 사회주의의 잔향은 정말 강력한가 보다. 이전에 러시아도 가보았지만 사회주의 영향 하에 있었던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고유한 저명도의 색채 그 무언가가 있다. 이런 사회주의 영향 아래에서도 보도블록 사이의 잡초처럼 예술의 꽃을 피웠던 예술가들이 있어 동유럽 여행이 기대된다.
교환학생 수업 시간에 자기 나라의 문화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체코에서 온 친구가 자신은 동유럽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던 일화가 생각났다. 체코는 지리적으로 봤을 때 유럽의 중심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다. 왜 나는 여태껏 동유럽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 체코가 동유럽인지 중유럽인지에 대한 답은 내가 내릴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언어 사용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다. 무심코 사용하는 어휘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항상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실에 가장 가까운 적확한 단어인지 자각하며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됐든 동유럽 여행은 꽤나 흥미로운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알폰소 무하와 밀란 쿤데라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시내에 도착하니 도시가 꽤나 칙칙하게 느껴진다. 햇살도 건물도 쨍쨍한 이탈리아에 있다 와서 그런지 약간 당황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이용했던 호스텔이 시설이 아주 깔끔해서 이내 기분이 좋아진다. 모자이크 하우스라는 곳이었는데 호텔이었던 곳을 호스텔로 바꾼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호스텔에서 짐을 정리하고 조금 쉰 뒤에 프라하를 본격적으로 구경해보기로 한다.
국립미술관과 바츨라프 광장은 대강 보기만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바츨라프 광장이 체코가 소련으로부터 벗어난 '프라하의 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곳이라고 한다. 분신자살도 일어났다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을 모티브로 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역사적인 곳에 가도 현대의 맛이 입혀지면 많은 것이 퇴색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역사의 농담(濃淡)을 길이길이 전하는 건 역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알폰스 무하 박물관에 왔다. 이전에 한국에서 예술의 전당 알폰스 무하전을 간 적이 있어서 비교가 되었는데, 규모가 더 컸던 예술의 전당 전시가 더 마음에 드는 편이긴 했다. 그래도 알폰스 무하의 나라에서 알폰스 무하의 박물관을 간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 전시에서 작품 하나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알폰스 무하는 주로 극장 포스터같이 상업적인 작품으로 유명해진 작가인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Star'라는 슬라브족의 민속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슬라브족 여성이 별이 빛나는 설원에서 고개를 젖히고 절망스러운 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녀 주변을 감싸는 푸르스름한 색감을 통해 이가 시릴 정도로 어스름한 공기가 느껴진다. 심지어 언덕 너머엔 늑대마저 그녀를 노리고 있다. 오직 빛나는 것은 하늘의 별뿐이다. 슬라브 민족 특유의 쓸쓸함과 척박했을 삶이 그대로 느껴지는 절절한 작품이었다.
박물관 감상 후 체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빵 ‘뜨르들로’를 뜯으며 시청 쪽으로 향했다. 뜨르들로는 사실 헝가리 유래 음식인데, 나무봉에 반죽을 빙빙 감아 회오리처럼 감싸 구운 다음 그 위에 계핏가루, 설탕, 견과류 등을 보기 좋게 뿌린 음식이다. 솔솔 새어 나오는 계피 냄새를 맡는다면 이 뜨르들로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안 음식점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했는데, 동유럽이라 그런지 가격이 매우 착했다. 만 오천 원 정도에 맛있는 파스타와 음료를 먹을 수 있었다. 분위기도 꽤나 운치 있었다. 외식하려면 재정을 거덜 낼 생각하고 먹어야 했던 프랑스에 있다가 오니 돈 쓰는 데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난 체코에 와서야 비로소 부자가 된 것이다!
배도 부르겠다 신이 나서 걷는데 구 시청 쪽 분위기가 바글바글한 것이 멀찍이부터 보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러시아의 춥고 긴 겨울이 끝난 것을 기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가 떠오른다. 온갖 공연이 펼쳐지고, 어린이들을 위한 간이 놀이기구, 먹거리 장터가 줄 지어 있다. 알록달록한 색을 한 각종 차양들이 광장에 색감을 더한다. 단조로운 선율의 음악들은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정겹다. 캔버스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어디서 봐도 반갑다. 따스한 햇살 아래 이런 활기찬 분위기를 보니 저절로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프라하 구 시청이 있는 구 시가지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됐다는 천문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매 정시마다 인형들이 나와 시간을 알리는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린다.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 인형이 죽음을 알리고, 인간의 탐욕, 증오를 상징하는 인형이 죽음을 맞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 위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가 인간들을 조용히 지켜본다. 뜻을 모르면 귀여운 인형극 같지만, 그 내포된 의미를 알고 나면 1분가량의 짧은 퍼포먼스에서도 많은 철학적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까를교로 향했다. 까를교는 아마 유럽에서 한국인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일 것이다. 프라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오기로 유명하다. 한국인들끼리 정분도 많이 난다던데.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해도 프라하의 아름다움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프라하만의 매력이 뭘까 생각해본다. 까를교에서 프라하성이 보이는데 이 광경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어김없이 잔디밭에서 커플들이 뒹군다. 그래, 이 정도 분위기에서 정분이 안 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 프라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로맨틱한 도시다. 눈앞에 펼쳐지는 까를교, 프라하 성, 블타바 강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어우러진다. 그런데 이 프라하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너무 화려하지도, 젠체하지도 않는 느낌이다. 어느 구석은 조금 망가져 있고, 지저분하기도 하다. 유수의 쇼핑센터나 명품 거리가 있지도 않다. 음식은 싸고 맛있고, 맥주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정겹기까지 하다. 프라하 사람들은 쌀쌀맞은 것 같으면서도 시골 사람 같이 친근한 면이 있다. 이러니 프라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까를교 주변을 산책하다가 슬라브스키라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동유럽 식당에는 항상 피아노 연주자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야경을 기다렸다. 야경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다. 고흐가 그랬던가. 밤은 낮보다 더 풍부한 색을 지니고 있다고. 저기 강 위에서 크루즈 파티를 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나도 언젠가 연인과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