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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Oct 05. 2021

부다페스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식사

[프랑스 교환학생기] 64. 부다페스트3


오늘은 드디어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노천 온천인 세체니 온천에 가기로 한 날이다. 혼자서 호텔 조식을 먹고 부리나케 나섰다. 참고로 호텔 조식은 2500 포린트로 싼 편도 아니었는데, 맛도 그냥 그랬다. 나는 숙소에서 세체니 온천까지 걸어가는 방법을 택했는데 구글 지도대로 걸어서 딱 30분. 걸어가는 동안 부다페스트의 평범한 거리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온천 시설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씻는 곳이 따로 있지도 않고, 남녀 라커 구분도 없었다. 나는 눈치껏 사람이 없는 라커를 찾아 누가 볼세라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우리나라 사우나를 기준으로 두다 보면 웬만한 사우나는 다 기대 이하 일 것이다. 선입견 없는 여행을 위해선 한국에서의 기준을 두고 올 필요가 있다.



세체니 온천은 1913년에 바로크 리바이벌 건축풍으로 건립되었다. 건축 당시에는 민영이었으며, 1927년에 확장되었다. 온천이 버텨온 역사를 생각하면,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하다고 해야 할 수도 있다. 온천의 성분으로는 황산염, 칼슘, 마그네슘, 중탄산염, 불소 등이 포함되며 척추 등에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현재에도 온천수는 74와 77의 2개의 샘에서 공급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세체니 온천을 오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노천탕에서 체스를 두는 아저씨들의 사진 때문이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온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 위에 체스판을 두고 즐기는 장면이라니 내게 이국적임 그 자체였다. 가끔은 강렬한 비주얼이 내가 가야 할 곳을 충동적으로 정해주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탕을 돌아다니며 온천을 구경하는데, 그때 당시엔 화려하고 새로웠을 바로크 리바이벌도 지금은 이렇게 낡았구나 싶다. 물 온도가 미지근한 게 좀 아쉬웠다. 한국처럼 몸이 익을 정도의 온도에서 좀 지져줘야 온천한 맛이 나는데 말이다. 그래도 사람이 적당히 많아서, 사람 관찰도 하면서 혼자만의 사색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온천을 나와서 온천 근처에 있는 시민공원을 걸었다. 나는 군델 레스토랑이라는 곳을 구경했는데, 글루미 선데이에 나온 곳인 줄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자보 레스토랑이었더랬다. 영웅광장을 중심으로 고대와 현대 박물관이 있는데, 이 두 박물관 모두 별로 끌리진 않았다. 어제 부다 왕궁 쪽 국립 미술관을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대신 영웅 광장에서 혼자 사진을 잔뜩 찍으며 햇볕을 즐겼다. 광장은 넓고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놀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왔는데, 비 오는 시민공원을 헤치고 눈에 띄었던 레스토랑 로빈슨이라는 곳으로 뛰쳐 들어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에 식당 인테리어 또한 모던하고 고급스럽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지중해식 음식도 아주 훌륭했다. 혼자 즐긴 식사 중 최고로 꼽힐 만큼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계속 산책을 이어갔다. 헝가리 역사서를 처음 썼다는 왕 벨라 3세의 동상을 만났다. 이 동상이 쥐고 있는 연필을 만지면 똑똑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나도 한번 만지고 왔다. 대체 이런 전설은 누가 만드는 걸까? 동상을 세운 공무원이 흥행을 위해서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닐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물과 맥주를 샀다. 유럽은 대게 맥주값이 아주 싸서 맥주를 먹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이다. 씻고 맥주를 한잔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나는 온천도 갔다 왔겠다 이미 몸이 많이 노곤 노곤했지만, 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나섰다. 우리가 간 곳은 다른 한국인 친구에게 극찬을 받은 멘자(Menza)라는 식당이었다.

 


억지로 끌려나간 외출이었지만 이 식당은 결과적으로 내 인생 식당으로 등극해버린다. 우선 주황색 조명에 현대적인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곳은 인기 식당인지라 웨이팅이 있었는데, 웨이팅 하는 좌석도 따로 있었고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고 간식도 내어주었다. 서비스 만점. 간식으로 내어준 스틱 프레첼도 계속 리필해준다. 유럽에서 이런 서비스는 드문데,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기다림 끝에 앉은 우리는 둘이서 세 가지 메뉴부터 시작했다. 동유럽 국가에 오면 우선 1인 1 메뉴로는 부족하다. 1.5 메뉴부터 시작한다. 주변에 앉은 프랑스 부부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나는 닭가슴살 구이, 아보카도와 양파 등을 으깬 샐러드, 고구마튀김이 한 플레이트에 나오는 메뉴를 주문했는데 세 가지 모두 아주 훌륭했다. 게다가 나의 최애 맥주 크로넨부르 블랑을 시켰는데 생맥주라서 그런지 맥주의 신선함과 레몬향의 상큼함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멘자의 직원들은 세계에서 가장 친절하고도 유쾌한 종업원 대회에 나간다면 단연 1등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문 마지막엔 항상 "Thank you very much"절대 빼먹지 않는다. 인테리어, 음식, 서비스 모든 것이 삼박자를 맞추다 못해 춤을 추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생일 축하 노래가 나온다. 기어이 레스토랑 내에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쳐주고 레스토랑의 흥겨운 분위기는 고조된다. 커플부터 가족단위까지 이 레스토랑의 손님들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졌다. 멘자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두 가지 정도는 더 먹었어야 하는데, 내 위가 이것밖에 해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식당을 나가는데 웨이터가 장난스레 밤에 또 술을 마시러 오라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 능청을 떠는 성격이 아니지만 유럽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자연스레 그에 맞춰 너스레를 떨게 된다. 부다페스트에 대해 함부로 재단한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부다페스트는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라 살아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기쁨, 행복, 즐거움이 살아있는 곳.

 


하루의 마무리는 야경이다. 부다페스트에 온다면 부지런히 야경을 봐야 한다. 이건 법칙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어부의 요새에 내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마주했다. 국회의사당과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부다페스트의 지독한 어둠까지. 어부의 요새에 가족끼리 함께 온 한국인들이 보인다. 가족들 생각이 난다. 좋은 곳에 혼자 왔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안타깝다. 좋은 곳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아야 비로소 완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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