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환학생기] 72. 니스
프랑스 남부로의 여행이다. 추운 북부에만 있다 보니 남부가 더욱 기대된다. 프랑스 남부 애들은 성격이 사납다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기차에 몸을 싣는다. 20인치라도 캐리어는 캐리어라고 들고 다니는 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아침부터 너무 피곤해서 기차에서 거의 기절해버렸다. 입을 있는 힘껏 벌리고 잤다. 입안이 뻐석뻐석한 것이 수분이 하나도 없다. 그 와중에 기차가 아비뇽을 지나간다. 아비뇽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비뇽 유수'. 낯선 두 단어가 만나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데,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황금빛 그 자체다.
니스는 서울의 1/9 정도의 면적에 인구는 35만 명 정도다. 니스 역에 도착하니 역 근처 공사장에 둘러쳐진 슬레이트가 눈에 띈다. 노란색 작업모를 쓰고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여러 명의 작업자들의 사진이 실제 사람 크기로 쭈욱 둘러져 있다. 이 사진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추측해보건대, 이곳에 일하는 노동자들도 모두 우리의 이웃들이라는 것 아닐까? 휴양지에 와서 뜻밖에 심오한 주제를 신선한 방식으로 맞닥뜨린 기분이다.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시설은 둘째치고 청결이 좋지 못하다. 콘센트도 없다. 숙소가 편치 못하면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갔을 때가 너무 고역이다. 지친 몸을 편하게 쉬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행 자체가 몇 배는 피곤해진다. 그래도 여긴 니스니까 불청결한 숙소 따위는 잊기로 한다. 어서 숙소를 박차고 나가자. 해변가로 걸어갈수록 파란빛 바다가 내 시야를 덮쳐온다. 이곳이 사진으로만 보던 니스구나. 특별할 것은 없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천국 같은 해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겐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자라에서 여름 신발을 쇼핑하는 것. 겨울 짐만 챙겨 오다 보니 해변을 즐길 여름 신발이 없던 것. 자라는 정말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브랜드가 아닐까. 니스 자라라니. 현실 감각이 마비된 채로 쇼핑에 열중하다 보니 신발만 네 개를 사버렸다. 한국에 돌아와선 절대 신지 않게 된 카키색 스웨이드에 징이 박힌 에스파드리유 신발은 니스에선 제 역할을 열심히 했다.
레스토랑에서 해물파스타와 피자를 먹었다. 내가 있는 이곳이 그 유명한 해변 '니스'라는 점 때문인지, 날씨는 미친 듯이 화창하고 조금만 고개를 들면 해변이 보이는 곳이라 그런지, 해물파스타가 마치 바다 그 자체로 느껴진다. 파스타 면과 해물들이 살아서 왈츠를 춘다. 해산물의 비린 향이 강하게 올라오는 데 그마저도 니스스럽게 느껴진다. 온갖 재료들이 감칠맛 나게 혀 안을 자극하는 덕에 술은 화이트 와인 한잔밖에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만취한 기분이다. 식사의 여운이 아쉬워 근처 모노프리에 가서 와인도 한 병 샀다.
니스에도 밤이 찾아왔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가. 니스는 해 질 녘부터 깊은 밤 시간이 더 아름다웠다. 니스 중심가에 있는 분수는 조명을 받아 마치 뜨거운 우유가 끓는 것처럼 하얀 물줄기를 내뿜는다. 분수 주변에는 스팀이 분사되어 니스의 밤을 한껏 몽환적으로 만드는데, 마치 하나의 설치 미술 작품 같기도 하고 옛날이야기 속의 산신령이 펑하고 나올 것 같기도 하다. 분수에서 나온 물이 자박하게 바닥에 고여 마치 거울처럼 니스의 밤 풍경을 그대로 반사시킨다. 바다는 어둠으로 변해버렸지만 니스를 수놓는 알록달록한 조명과 불빛에 은은히 형체를 드러내는 야자수들이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지중해만의 이미지를 선사해준다.
돌아온 호스텔은 변함없이 쾌적하지 못했다.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카락이 잔뜩 껴있다. 아까 먹었던 음식이 올라올 것만 같다. 방에 있는 대만 애들은 영어와 불어로 대화 중이다. 현실의 감각과 비현실적 분위기가 내 뺨을 번갈아 한 번씩 때리는 것만 같다. 그래도 어찌 됐든 몽글몽글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