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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에 데려가는 일

선생님의 일이란

by 정인


ㄱ과 ㄴ에 맞는 극적 사례를 각각 제시하고 본인은 어느 입장에 가까운지 자신의 교직관을 빗대어서 설명하라.

ㄱ. 우물가에 데려다 놓지만 물을 억지로 먹일 수 없다.
ㄴ. 우물가에 데려가서 물을 억지로라도 먹이게 해야 한다.


2020년 중등교사 임용시험 면접 문제였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한 이 문제를 읽고 나는 생각했다. 물을 먹이는 건 둘째치고 일단 우물가에 데려가는 게 문제인데요. 눈물 한 방울. 또르륵.




두 개의 반이 함께 수업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볼스포츠 반과 함께 한 날에는 패들 경기장에 갔다. 패들은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테니스도 아니고 스쿼시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경기를 하는 것이다. 볼스포츠 반 학생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지, 알아서들 신발을 갈아 신고 코트를 하나씩 점령하고는 저들끼리 공을 주거니 받거니 시작했다. 우리 반(크리에이티브)은 어리바리 따라간 상황. 어슬렁거리는 모습에서 의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게 보였다.


볼스포츠 반의 안드레아스 샘이 멀뚱멀뚱 서 있는 우리 반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았다. 공을 튕겨 넘기는 것을 몇 번 시범 보이더니, 어찌어찌해야 점수를 얻고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명을 듣는다고 없던 의욕이 생길 리가 없다. 그나마 자크와 블랏은 형제지간이라 서로 공을 넘겨주며 뭔가를 하는 듯했는데, 애초에 조금의 관심도 없던 다나는 일찌감치 벤치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비라와 심드렁하게 공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딱히 관심도 없는 데다가 잘하지도 못하니 나 역시 의욕이 없는 건 마찬가지.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우리 반 친구들이 꾸역꾸역 공을 튕기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기가 힘들다. ‘하기 싫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학생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봐온 나.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다. 직업병인가. 나는 여기서 선생님이 아니고 학생의 입장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을 그냥 둘 수가 없다.


비라에게 다가가서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양 다른 걸 하자고 제안을 했다. 경쟁 없이 공이 열 번 왕복하는 것을 목표로 랠리를 이어가는 것이다. 학교에서 써먹던 방법이다. 경기 규칙대로 하면 학생들의 경쟁심에 불이 붙어서 서로 스매싱만 해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함께 재미있게 놀기보다는 공격하고, 방어하고, 바닥에 떨어진 공 줍느라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랠리를 이어가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면 상대방이 받을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로 서로 잘 보내주는 것이 주 활동이 된다. 게다가 서로 합이 잘 맞아야 하므로 성공하면 같이 즐거워한다.


비라와 나, 둘 다 오늘 처음 해보는 것이라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열 번 왕복이라는 공동목표를 향한 서로의 눈빛을 감지했다. 나는 비라가 공을 넘기면 꺄악, 꺄악, 소리를 질러가며 열정적으로 받아주었다. 구석에서 무심하게 공을 튕기던 우리가 코트 전체를 다 차지하고 활개를 쳤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뽀송뽀송했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둘 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중에는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발견했다. 노르웨이 강추위에 겹겹이 입었던 옷은 금세 벗어던지게 되었다. 나는 비명소리와 함께 온몸을 날리는 몸개그까지 쳐주느라 두 배로 지쳤다. 비라가 깔깔대며 좋아했다.


성공할 듯 말 듯 한두 번이 모자라 번번이 실패했다. 왠지 모르게 나도 열정이 불타올라서 ‘아!’ 하고 탄식을 내질렀는데, 그때마다 비라는 잠깐의 쉴 틈도 없이 다시 공을 넘겼다. 의욕 없이 무심하게 바닥에 공을 튕기던 모습이 언제였냐는 듯, 비라는 팔을 크게 돌려 라켓을 휘둘렀다. 비라의 이글거리는 눈을 본 것도 같다. 나는 숨이 넘어가면서도 비라를 상대하는 일을 멈추기 어려웠다. 조금만 허둥대는 모습만 보여도 비라가 ‘정인!!’하고 이름을 불러재끼며 채근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 다른 학생들이 와서 같이 경기를 해보겠냐고 물었다. 비라가 망설임 없이 우리는 다른 걸 할 거라고 대답했다. 맞아, 우린 다른 걸 하는 중이야, 하고 나도 거들었다. 힘이 다 빠져나간 손이 약간 후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으로 기껏해야 조그마한 샌드위치 하나를 먹었는데, 그마저도 마지막 한입을 다 씹기도 전에 비라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코트로 다시 질질 끌려가면서 속으로 ‘너무 힘든데?’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목표를 높여 말했다. 오케이, 이번에는 스무 번 왕복이 목표야!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다들 자기 짐을 꾸리고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비라는 나에게 공을 튕겨 넘겼다. 안드레아스 샘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힐데 샘은 흐뭇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헉헉대며 허접한 공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박제되었다. 어이없는 자세와 산발이 된 머리칼이 찍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열심히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흐뭇한 건 없지. 안드레아스 샘과 힐데 샘의 마음을 알고 있다. 비라를 보는 내 마음이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왜요? 왜 해야 되는데요?’를 시전 하는 학생들을 마주하는 일은 씁쓸했다. 달래도 봤다가, 웃겨도 봤다가, 으름장을 놨다가 하다 보면 소위 ‘현타’가 오는 일이 잦았다.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동안 나는 늘 여러 갈래의 마음으로 고민했다.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시험을 잘 보든, 실력이 늘든, 뭔가를 깨닫든 아무튼 무언가 대단하게 발전한 ‘결과’의 모습을 보며 내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학생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늘, 어떻게 해야 ‘시작’하게끔 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우물가에 데려가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문제는 우물가로 데려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그 앞에서 내가 먼저 그냥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물을 마신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이걸 좋아해!’ 하고 말한다. 내가 그것을 대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 그걸 선택하는 학생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 그 결정이 행복을 만들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 안달복달 지금 당장 결과를 보려는 조급한 마음만 내려놓으면 그 뒤에는 학생들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간다.


인간은 마냥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고 각자의 욕구와 동기가 있다. 이런저런 목표와 외부 동기를 만들어 불어넣는 것에 주목하던 것이 과거의 패러다임이었다면, 이제는 내재되어 있는 그 동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으면 배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멋진 바다의 모습을 상상하게끔 하라지 않나. 거기에 더해 진정한 리더는 리더 자신을 믿고 따라오게 하는데 공을 들이기보다, 개개인이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믿게끔 만든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비라가 다른 친구들한테 오늘 활동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말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우리 오늘 되게 재밌었지!’ 하는 비라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나는 남들 보란 듯이 ‘네가 잘해서 그래!’ 하고 큰소리치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비라가 뒷자리에서 깔깔대는 소리를 들었다. 땀이 식어서 몸이 서늘해지니 나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창밖으로 주홍색의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문득, 그동안 학교에서 내가 하던 일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며칠 전, 이전에 일했던 학교의 졸업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 움직이는 일이면 학을 떼는 학생들을 보다가 달리기 모임을 만들었었는데, 그때 저녁마다 함께 달렸던 학생이었다. 주말에 같이 마라톤 대회를 나가기도 했었다. 여전히 아침마다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나는 달리기를 멈춘 지 꽤 되었는데, 그 학생들은 그때의 경험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체육전공도 아니니 이론도 없이 같이 땀을 줄줄 흘리며 달리기 연습을 한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우물가에 데려다 놓는 일을 해내면, 물 마시는 일은 알아서들 하는 것이다.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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