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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꽃무늬 치마를 입은 학생

올디스트(oldest) 학생입니다

by 정인

“나는 백오십 살입니다.”


헤헤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비야떼 샘이 낮은 목소리로 노르웨이어로 잘 모르겠으면 그냥 영어로 말해보라고 했다. 샘의 ‘엄한’ 표정에 순간 주눅이 확 들었다. 결국 내 나이를 솔직하게 밝히게 되었다. 내 목소리에서 기가 죽은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반대편에 무더기로 서 있는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강렬한 햇빛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운동장에서 말발굽 던지기 게임을 하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노르웨이어를 가르치려고 하는 비야떼 샘이 게임을 하다 말고 학생들을 불러 모으더니 노르웨이어 숫자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스물, 스물다섯, 서른... 기준을 세우고는 숫자에 맞게 나이별로 그룹을 지어 서게 했다. 선생님들과 함께 서른 살 이상 그룹에 서 있는 학생은 나 혼자였다. 그리고 비야떼 샘이 학생들에게 말하도록 한 노르웨이어 문장은 ‘나는 00살입니다’였다. 염려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마침내.


그동안 나는 누가 나이를 물을 때마다 졸업식 날 말해주겠다면서 킬킬 웃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학생들이 가득한 곳에서 괜히 나이를 말해서 ‘갭’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할 일 없고, 물으면 웃어넘겼다. 그냥 '올해 가장 나이많은(올디스트) 학생'이라고만 말했다. 어차피 아시안의 얼굴에서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그냥저냥 섞여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어이없이 노르웨이어 단어를 배우다 나이를 밝히게 된 것이다.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쏘-쿨’하게 밝혔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큰 소리로 외쳐버릴걸’ 하고 후회했다. 괜히 뭐라도 있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다가 더 어색하게 만든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책도 따라왔다.




“내가 열여섯 살에 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여든 살 학생이 있었지.”

학교로 돌아오는 길, 나란히 걷던 릴리안 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든’에 잘못 들은 건가 싶어 ‘Eighteen? Eighty?’하고 재차 물었다. 여든 살이요? 어이없이 나이를 밝히게 된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인가? 잘 모르겠다.


“네 나이면 아주 귀여운 편이지.”

릴리안 샘이 콧방귀를 뀌며 ‘그게 뭐 별거냐’는 듯이 말했다.


그분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손자뻘 되는 학생들과 동기로 지내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추측해 보지만 쉽지 않다. 릴리안 샘은 그분이 외할머니 것과 비슷한 치마를 입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고 하셨다. 발목까지 오는 긴 꽃무늬 치마를 입고 혼자 슬로 모션이 적용된 것처럼 느리게 이동하는 할머니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할머니 주변에 탄탄한 근육의 팔다리를 드러내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


육십여 년의 차이를 넘어서는 배움의 의지는 어떤 형태였을까. 그 나이에도 자신의 비어있는 부분을 인정하는 용기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배우려는 흥미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스란히 간직되었을까. 여든 살의 삶은 물음표가 줄고 느낌표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늘 우왕좌왕하는 지금과 달리 그때쯤이면 한자리에 여유롭게 머물며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살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세상을 팔십 년 넘게 살고도 학교라는 곳을 다시 찾아온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에릭 호퍼는 『인간의 조건(Reflections of the Human Condition)』에서 “교육은 배운 사람(learned)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learning)을 양성해야 한다”라고 했다. 진정한 배움의 결과는 어떤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배우려는 흥미’ 그 자체라고 보았다.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일수록 ‘계속 배우는 학습자’가 미래를 이어갈 수 있다고 했다. 배움을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과거 세계에서 살아갈 기술만 남아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1)


여든 즈음의 그 할머니가 궁금해했던 것이 궁금하다. 삶의 후반부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을지, 나에게 그것만큼 새로운 것도 없을 것 같다. 느리게 움직이며 학교 곳곳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으로 채웠을까. 혹은 무엇을 비워냈을까.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과거의 사람이지만, 이 순간 선명하게 살아나 나에게 미래로 향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형적인 ‘학생의 나이’를 한참이나 지나버린 나. 배움에 ‘때’가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나도 모르게 있는 것인지, 나이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쑥스럽다. 유별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올라오곤 한다. 이 나이에, 그동안 제자로 만나왔던 나이의 학생들과 지내며 하루하루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을 새로 배우고 있다. 생각도, 문화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해할 수 있을 듯 말 듯 했던 십 대 청소년의 심리상태를 때로는 직접 겪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묻고 답할 때마다 느린 학습자가 되는 것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이 ‘계속 배우는 학습자’로서 과거를 되짚어 경신하는 과정이며 미래를 새로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다른 학생들도, 그 옛날 여든 살 할머니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알고 있다. 여든 살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과 이팔청춘 소녀들의 뜀박질이 그저 모두 각자의 길을 만드는 과정이다. 나의 애매한 걸음도 그렇다.


이 나이에, 그걸 새삼스레 다시 배우러 이 먼 곳까지 왔구나 싶다.




덧)

쉬는 시간에 몇몇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였다. 단어를 보고 그림을 그려서 다음 사람에게 넘기면 그 그림을 보고 연상되는 단어를 써서 맞히는 게임이었다. 나에게 온 그림은 아주 단순했다. 직사각형 안에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자신 있게 ‘게임머신’ 하고 써서 넘겼는데 내가 적은 답을 본 펜느가 외쳤다.


“아, 이건 세대차이 때문에 나온 답인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나이 많은 내가 ‘옛날’ 게임기를 떠올리고 답을 썼다는 거였다. 답을 틀린 건 둘째치고 ‘세대차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하는 걸 보면 나이가 든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 참고문헌

1) 에릭 호퍼(Eric Hoffer). 『인간의 조건(Reflections of the Human Condition)』. 정지호 옮김. 이다미디어. 2014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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