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Summerhill School을 다녀왔다.
써머힐 학교에 가기 며칠 전, 아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는 학부모님과 면담을 했다.
풀어야 할 문제집 분량을 정해 직접 숙제를 내주고 확인도 하시는 분이었다. 숙제를 다 했느냐는 물음에 아이가 거짓말을 했고, 그날은 회초리를 들었다고 하셨다. 숙제보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둘 수 없으므로 따끔하게 정신 차리도록 했다는 말씀을 덧붙여 체벌의 정당성도 어필하셨다. 그리고 매를 맞은 고통에 놀라서 폴짝폴짝 뛰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며 말씀하신 것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프지? 이걸 꼭 기억해둬.”
아아...... 그 말이 없어도 아이는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통, 서러움, 억울함, 그리고 두려움. 어머님의 바람대로 아이가 정신을 톡톡히 차린다면 그것은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통제로 이어질 것이다. 나 역시 숱한 매질과 함께 자라온 한 사람. ‘사랑’의 매는 마음 곳곳을 할퀴며 상처를 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괴롭히는 흉터가 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이고 무마된, 일상의 억압과 통제를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며 산다. ‘널 위해서’, ‘네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해지는 많은 행위들이, 사실은 ‘내가 원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수행’을 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많은 어른들이 자신의 현재 삶을 스스로 결정해 살아본 적이 드물 것 같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현재는 늘 통제의 대상이었고,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것이며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믿으며 자라왔다. 그래서인지, 그 신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을 답습하며, 남을 사랑하는 방법도, 나를 사랑하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아이가 친구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고 ‘재미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연인의 옷차림을 단속하고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며 ‘사랑하니까’라고 말하는 일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매로 아이를 훈육하며 ‘아이의 미래를 위한 노력’이라 말하는 일이,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희생하자며 뼈를 갈아내도록 종용하는 일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이 바라지 않는 과도한 헌신을 하며 괴로움에 빠지기도 하고,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며 선택하는 일들이 하나같이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일 때도 고민은 늘 게으르다.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적이 없다 보니, 메말라 가는 일상으로 인해 지병을 얻는 일이 비일비재. ‘사랑하니까’ 라면서 너를 옥죄고, 스스로 자기 착취를 하는 우리는, 사랑을 너무 모르면서 사랑을 너무 쉽게, 많이 말한다.
써머힐 학교는 수업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학교생활로 유명하다. 많은 이들이 써머힐의 학교 생활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그 자유의 ‘정체’였다. 자유를 빙자한 무질서, 방탕하고 게으른 생활에 의심을 품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써머힐의 자유에 관해서만 이야기되는 것은, 조금 아쉬운 감이 든다. 지나고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삶에 자유를 보장하게끔 하는 사고방식(정신)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삶을 살고 있으며, 타인이 그 삶의 모습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것.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자기 삶을 스스로 추스르며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누가 누구에게 자유를 하사해서가 아니라, 모든 삶의 존엄함을 깨닫고 각자의 삶을 돌보며 사랑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
반면, 아이들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전 세계(!) 부모와 교육종사자들에게 사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게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써머힐은 그게 ‘진짜 사랑’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써머힐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며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조건 없이 믿어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동안,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스스로 돌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랬을 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역시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써머힐에서, 그 자유로운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의외로 어려웠다. 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몇몇 강의 시간을 빠져나올 때면, 왠지 모르게 ‘땡땡이’를 친 죄책감과, 멀리까지 와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초조함이 문득문득 올라오는 것이었다. 지금껏, 힘든 시간은 애써 견뎌내야만 하고, 매 순간을 아껴 뭔가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까닭이었다. 내 삶을 나 자신조차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각박한 성정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아이들에게 아프게 전해졌을 것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멋진 놀이터를 발견해 깔깔대며 시소를 타고, 잠시 낮잠을 잤다가, 불 꺼진 식당에 혼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면서, 죄책감도 초조함도 가지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써머힐에서는 누구도 내 하루를 판단하지 않으며, 나 스스로 만들어가는 하루의 의미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있다는 것을 공기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삶에 대한 믿음을 나보다 더 크게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면, 그것이 바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써머힐 학교 곳곳에 100년 전 학교를 처음 만든 닐(A.S. Neill)의 사진이 붙어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뛰어놀 수 있는 학교를 만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심각 그 자체. ‘진짜’를 고민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 앞에 엄지와 검지를 겹쳐 만든 ‘하트’를 잔망스럽게 날리며, 또 한 번 손쉽게 사랑타령을 해본다.
Summerhill School은 1921년에 설립되어 지난 100여 년 동안 학생자치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 대안교육을 실천해온 학교입니다. 2021년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를 위한 여러 행사들의 일환으로 2019년 7월 26~30일 교사 및 관심 있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써머힐 교내에서 써머힐의 방식대로 생활하며 함께 이 학교의 실천과 경험들에 대해 나누는 Summerhill Experience를 개최하였습니다. 써머힐을 체험하며 얻은 단상을 기록으로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