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남에게 둔 사람은 불안하다
뜬금없이 울려 퍼지는 무반주 노래에 아이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일이 더 어려워야 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말 대신 노래로 전하는 아이. 즉흥으로 나오는 노랫말은 후배들에게 전하는 편지다. 흔치 않은 광경에 아이들은 꿈지럭대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학기말 전교생이 함께 모이는 마지막 날. 중등 과정 수료를 앞둔 아이들이 후배들에게 남기는 말을 하는 시간이었다. 선배들이 ‘공부 열심히 해라’, ‘그냥 재미있게 놀아라’ 하며 나름 조언을 이어갔다.
그날 서현이는 자기 차례에서 일언반구 없이 노래를 했다.
화려한 무대와 큰 기획사를 상상하며 음악활동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다. 방송에 나오는 슈퍼스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이 없어 주눅이 들거나 한다. 오디션을 다니며 심사위원 눈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비싼 학원과 연습실은 필수처럼 느껴진다.
서현이는 좀 달랐다.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화려한 무대나 유명세는 고려하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보여주는 기대나 조언 같은 것도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냥 자신에게 몰두하는 아이였다. 일기를 쓰듯 노랫말을 짓고 음을 붙여 노래를 만들곤 했다. 중등 과정 수료 전날에는 아이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전할 말을 노래로 불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고등과정에서도 꾸준히 악기를 연습하고 노래를 만들었다.
대안학교에 워낙 예술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 특별하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무릎을 치며 감탄한 일이 있다. 음악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모여 앉아 홈레코딩 설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값비싼 마이크며 녹음 장비들을 언급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비용이 많이 들어 선뜻 녹음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서현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이미 녹음하고 있는데?”
응? 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낡은 노트북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노트북 귀퉁이 조그마한 마이크 구멍에 입을 대고 녹음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당연히 최상급 음질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서현이의 마음은 환경이나 장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행복하게 노래할 뿐. 그렇게 녹음한 것으로 공모전에도 내고 그 후로 공연도 이어졌다.
졸업을 앞둔 시기에는 개인 프로젝트로 강제 철거 마을이나 억울하게 내쫓긴 상인들을 위한 연대공연에 섰다. 무대의 크기나 다른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연결된 예술인들과 졸업 후에도 꾸준히 노래를 부르며 지냈다. 열창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벼락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카페에 앉아있는데 서현이의 노래가 배경음으로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또 어느 날은 방송에 나오는 걸 보게 되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며 살다 보니 가수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그게 더 좋다고 했어요.”라며 자기 선택의 이유를 말하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생각’을 잘 들여다보면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생각이거나 다들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안다. 자기 근거를 마련하기 어려운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세상은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원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바람이 부모님의 것일 때도 흔하다. 자신의 소망을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것으로 대체하고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많은 부분 세상이 바라는 것에 맞춰가며 산다. 가만히 내 생각을 들여다보면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타인의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나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회적 존재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판 없이 순응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는 게 문제다. 나는 사라지고 타인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알아차릴 짬이 없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만,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보도 한몫을 한다. 미디어에서는 개인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계속 보여준다. 어떤 물건을 가져야 행복할 것인지, 무엇을 성공이라 하는지, 어떤 삶이 배척당하고 비웃음을 사는지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어떤 삶이 찬사를 받는지, 그 반대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불행한지를 학습한다. 이런 것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일종의 집단적 암시가 된다.
자기 선택과 결정이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면 언제일까. 사는 동안 매 순간이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진로, 진학과 관련된 고민을 할 때 그 중요도가 최고조에 이른다. 문제는 자기 이해가 바탕이 되어있지 않다 보니, 수많은 타인의 기준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온갖 검사 도구들과 시험들이 나에 대해 진단을 내려주면, 그 점수들을 가지고 내가 자리할 곳을 찾게 된다. "엄마가 그거 하라던데요?"같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조금은 참담하다.
자기 내면을 살피고 그 안에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터무니없이 적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해지면 정작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는 놓치게 될 때가 많다. 결국 사회적 평판이나 취업률과 같은 것들이 결정을 위한 기준이 된다. 보란 듯이 사는 것이 중요해서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꽤 진지하게 생각한다. 자기 행복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생각과 바람으로 살면서 온전한 자아가 형성되고 건강한 자존감이 생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서도 어려운 문제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풍선을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의 예를 자주 든다. 다른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갖고 싶다’며 보채는 아이가 있다. 떼를 써서 풍선을 얻고 나면 잠시 행복한 듯하다. 하지만 얼마 후 다른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풍선에 흥미가 사라진다. 풍선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가진 것과 상관없이, 혹은 다른 사람의 평가가 없어도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진짜 원하는 것이다. 선택의 기준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타인의 감탄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감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
아이의 행복과 불행이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대나 선생님의 칭찬에 의존하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칭찬의 역효과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다. 칭찬을 갈구하며 다른 사람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알피 콘(Alfie Kohn)은 칭찬을 통해 ‘평가’하려는 그 생각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2) ‘잘했다’, ‘좋다’와 같은 말들은 대부분 어른의 일방적인 평가일 때가 많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기준을 제공하면서 기대하는 바를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과 같다. 이는 아이들이 자신의 기쁨과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다. 자신의 만족감이나 성취보다 타인의 평가나 사회적 평판에 익숙해진다.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 혹은 자신의 희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흔히 말하는 성공의 조건이나 유명세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 질문으로 삶을 위한 교육이 시작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이 시작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고 경쟁이 치열한 문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준을 내려놓으려면 큰 용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 나아갈 때 오히려 두려움이 줄어드는지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남에게 둔 사람은 불안하다. 타인의 인정을 기다리는 삶은 애달프다. 좌판에 잘 팔리는 물건을 내놓는 것처럼 자신을 대한다면 그 자아가 건강할 리 없다. 삶의 기준을 남에게 두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만들어놓은 암시를 그저 전달하고만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모습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자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삶을 자신의 감탄으로 채우라고 말이다.
시를 쓰던 소년이 기억난다.
담담하게 적은 일상의 모습은 큰 울림이 되었다.
동요를 만드는 작가는 소년의 시에 마음이 동해 곡을 붙여 선물했다.
방학 중 어느 날.
소년은 사설 학원에서 웬 적성검사인지 뭔지를 하게 되었다.
그러더니 대학배치표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점수에 맞춰서 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취업이 잘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소년의 모습은 쓸쓸했다.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소년들이 그렇게 자라 버린다.
※ 참고문헌
1) 아직도 진정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면!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 [미진서재] https://youtu.be/QoLJqOvY7AI
2) 『학교란 무엇인가』. EBS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중앙북스. 2011. p.3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