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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May 08. 2023

꿈이 뭐냐고 좀 묻지 마세요

묻기 전에 생각했나요


한 학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에 아빠가 자꾸 넌 꿈이 뭐냐고 물어요.”

그래서 톡 쏘며 말했다고 한다.

“아. 그런 것 좀 묻지 마세요.”





▪ 꿈이 뭐냐고 묻는 어른들의 속마음

살아보니 나이가 든다고 미래가 선명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유독 청소년기에는 자립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안팎으로 느낀다. 특히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의 경계에서 느끼는 조급함은 전 세계적 특징이라고 한다. 그들의 삶에는 막연하게 관심 가는 이러저러한 것들과 뚜렷하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일들이 늘어서있다. 막막함과 불안이 큰 시기이다. 이럴 때 넌 무엇을 결정했냐는 질문은 재촉에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비교와 경쟁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혼자 낙오되는 느낌을 일찌감치 알게 된다. 뭔가를 답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답하든 질문한 어른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 질문 자체가 짜증이 난다. 그래서 요즘에는 꿈이 뭐냐고 물으면 “그런 것 좀 묻지 마세요.”라고 답하는 아이들이 있다. 뒤숭숭한 마음을 감추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진로를 결정한 아이들은 편할까. 모든 어른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언을 한다면서 아이들의 희망을 꺾는 경우도 많다.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넌 아직 부족하다’, ‘그래가지고 되겠니’와 같은 말을 듣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내용은 이렇다. “현실은 그렇게 해맑지 않아. 지금의 실력으로는 그냥 취미일 뿐이야. 그렇게 취미 수준으로 해서는 살아남지 못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스스로 부족한 것을 깨닫고 빨리 준비를 해야지.”


어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조언이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 어른들의 냉철한 시각이 아이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아이가 좋아하던 활동도 학을 떼게 할 것 같은 말을 해주게 된다. 혹은 아이들이 말한 꿈 위에 ‘그것보다는…’이라는 말을 덧씌우곤 한다. 이렇게 어른들의 생각을 정해놓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의 대답 안에서 꿈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꿈이 뭐냐고 묻지 말라는 아이들의 되바라진 모습을 탓할 것이 아니다. 넌지시 물을 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가는 아이에 대한 신뢰가 담기지 않으면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꿈이 뭐냐고 묻는 어른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이런 기운을 뿜고 있다면 아이들은 기똥차게 알아차린다.




▪ 청소년기는 이것저것 한번 해보는 시기

청소년기는 뭔가를 결정하는 시기가 아니라 한번 해보는 시기이다. 깊이 있게 들어가기보다는 이것저것 찔러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 경험해 봐야 그것이 나에게 맞는지 어떤 일이 즐겁고 행복한지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푸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다 뜬금없이 성적에 맞춰 진로를 정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거나 취업을 하고도 혼란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에 대한 탐구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정체성 발달에 관심을 둔 학자들이 많다. 그중 발달심리학자 제임스 마샤(James E. Marcia)는 이것저것 찾아보고 경험하며 스스로 애써보는 것이 청소년기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했다. 그는 ‘탐색(exploration)’과 ‘전념(commitment)’을 기준으로 청소년기 정체성을 분류했다. ‘탐색’은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를 제공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여러 직업을 검토하고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을 찾고 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전념’은 어떤 이념이나 직업세계에 실제 몰두하며 노력하는지를 의미한다. 마샤는 이러한 탐색과 전념의 여부에 따라 정체성 발달이 다른 모습을 보이며 ‘정체성 혼미’, ‘정체성 상실’, ‘정체성 유예’, ‘정체성 성취’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정체성 혼미 

가장 미성숙한 상태인 ‘정체성 혼미’는 탐색도 전념도 하지 않는 상태이다. 주어지는 어떤 갈등이나 위기가 없다. 자기 문제에 대해 탐구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경 쓰고 노력해야 할 대상도 없다. 불만이나 의심도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이다. 딱히 주어지는 기회도 없다. 자기 생각이 세워지지 않아서 문제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능력에 맞는 적절한 탐색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은 성취를 쌓아 나갈 수 있게 돕는 것이 좋다.


- 정체성 상실

‘정체성 상실’은 탐색 없이 전념만 이루어질 때이다. 스스로 고민 없이 남이 제시하는 것을 따르며 열심히 수행하는 상태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하는지는 모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고민해보지 못했다. 어른들과 사회가 이야기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력을 다하는 보통의 아이들이 해당될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보상이나 칭찬이 아닌 스스로 만든 성취가 중요하다. 또한 이들이야말로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정체성 유예  

‘정체성 유예’는 활발하게 탐색이 이루어지지만, 아직 실제 수행과 몰입은 얕고 모호한 상태이다. 깊이가 있거나 전문성이 높지는 않다. 다만 다양하게 접해보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사실 불안이 높은 상태이다.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시도해 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기대하고 권해야 하는 모습이다. 여러 가지 대안을 찾으며 자신이 노력해야 할 지점을 찾는 중이기 때문이다.  게일 쉬히(Gail Sheehy)는 정체성 유예 단계를 ‘잠정적 성인기(Provisional Adulthood)’라 하기도 했다.


-정체성 성취

혼란한 시간을 충분히 겪으면서 점차 ‘정체성 성취’ 단계로 나아간다. 정체성 성취의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상을 만든다.  


요컨대, 청소년기는 여러 가지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두리번거리는 시기라는 것이다. 언제든 그 대상이 바뀔 수 있다. 어른들은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을 염두에 두고 있다 보니 시시각각 바뀌는 아이의 관심사에 불안해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건강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다. 당연히 취미 수준일 수 있다. 청소년기는 깊이를 파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탐색하며 넓고 다양하게 파는 시기이다. 거기에 노력이 투입될 때 이후에 깊이와 전문성이 생긴다.




▪ 진로 선택은 되도록 늦게

덴마크인 에밀 라우센은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지내면서, 덴마크와 한국의 특징적인 차이를 발견하곤 했다고 한다. 어릴 때 그의 부모님은 방향이나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늘 자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고 회고한다. “저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덴마크의 많은 어른은 “네가 좋다고 느끼는 걸 선택해야지”라고 대답한다.1)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장래희망이 뭔지 묻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거나 냉혹한 현실을 깨우쳐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불행하다’고 여기는 북유럽의 문화권2)에서는 아이들이 진로 결정을 아주 '천천히' 하도록 독려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진로를 찾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충분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어릴 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삶은 변화무쌍하다. 그 삶이 놓인 세상마저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대에 빠른 결정은 섣부르다.


게다가 자신의 꿈을 찾고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이 할 일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그것을 대신하려고 할 때가 있다. 혹은 마치 그 꿈을 실현시켜 주는 사람인 것처럼 굴 때가 있다. 아이들에게 맡기면 실수와 실패를 겪으며 멀리 돌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이리저리 뛰며 길을 내고 채근하는 역할을 맡는다. 진로를 빨리 결정해 부지런히 준비해야 늦지 않는다며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그 꿈이 무엇이든 어른이 결정하거나 가능성을 판단할 때 아이들의 꿈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스스로 즐겁게 했을 때 좋은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좋아서 선택한 일은 어려움이 생겨도 상대적으로 감당해 낼 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꿈꾸고 선택하는 것이 어른들의 바람과 다르더라도 지지해 줄 필요가 있다. 주변의 어른들은 지켜봐 주고 신뢰를 보여주는 존재이다. 스스로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주고 기다릴 뿐이다. 그럴 때 아이들도 실수나 실패에 상관없이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 가장 즐겁고 행복한지 스스로 알게 되면 꿈도 목표도 그에 맞게 점차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꿈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고픈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면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은 일단 멈추자. 이미 속 시끄러울 테니 그 혼란을 기꺼이 겪으며 나아갈 수 있도록 그저 응원해 주면 된다.   



※참고문헌

1) 『상상 속의 덴마크』. 에밀 라우센, 이세아. 틈새책방. 2018. p.111

2)  『North 리얼 스칸디나비아』. 브론테 아우렐. 안나 야콥센. 니들북. 2019.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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