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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쥐 Apr 05. 2022

할머니표 정식

전기구이 통닭과 돼지고기 야채 볶음밥, 된장찌개

할머니표 정식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말마다 혼자 할머니 집을 갔었다. 주말에도 일을 하셨던 부모님이 매주 나를 데려다주시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은 장승배기, 할머니 집은 옥수동으로 버스로 약 45분을 달려야 했다. 받아쓰기도 완벽하지 않던 어린 나이에 혼자서 할머니 집을 찾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맛있는 것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가 가장 컸었다. 할머니 집에 가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할머니 정식'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기구이 통닭과 중국식으로 볶은 돼지고기 야채 볶음밥, 된장찌개 세트였다. 짜인 루틴처럼 토요일 점심엔 전기구이 통닭을 먹고 저녁으로 돼지고기 야채 볶음밥과 된장찌개를 먹는 순서였다. 토요일이 되면 출발 전 할머니께 미리 도착 예정시간을 말씀드리고 출발한다. 그러면 보통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할머니가 통닭을 구워 두셨다. 나는 할머니의 전기구이 통닭을 너무 좋아해서 할머니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면 고소한 닭고기 내음이 풍겨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어떤 때는 단지 입구부터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달려간 적도 있다.


할머니의 전기구이 통닭은 매우 간단하다. 껍질은 바삭, 속은 촉촉한 맛있는 전기 통닭구이의 레시피를 소개해 보겠다. 사실 신선한 닭 한 마리와 소금만 있어도 요리의 절반은 끝난 것이다. 닭은 언제나 옳으니까. 그리고 미국에 사시던 고모가 보내주신 미제 전기오븐도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그 전기오븐은 거의 해리포터도 마법 대신 썼을법한 대단한 기계였다. 오븐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마법같이 모든 재료들이 다 맛있어졌기 때문이다. 닭은 물론이고 감자, 고구마, 계란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넣으면 금세 맛있는 것으로 변해 내 입을 즐겁게 해 줬다. 그래서 보통은 닭에 소금과 후추, 버터로 밑간을 하고 감자나 고구마를 함께 올려 오븐에 돌렸다. 닭고기 육즙과 기름에 어우러진 감자 맛은 가끔 닭고기 맛과 우열을 다투기도 했다. 레시피는 이걸로 된 것이다. 단순하지만 좋은 재료가 주는 묵직한 감칠맛과 질리지 않는 풍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닭고기를 매주 고대하며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나를 맞이하는 옛 전기오븐의 뜨듯한 열기와 닭고기와 감자가 익는 고소한 냄새를 어찌 질린다 할 수 있을까?

‘내 강아지 왔나?’ 멀찍이 들리는 할머니 부름에 달려가 부엌에 계신 할머니를 끌어안는다. 포근한 할머니 내음까지 어우러져 온 집안에 행복한 냄새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비로소 닭이 다 익으면 할머니는 맨손으로 부드럽게 익은 닭을 먹기 좋게 쪼개 주셨다. 김이 펄펄 나는데도 ‘괜찮다!' 하시며 닭다리를 내 그릇 위에 얹어 주신다. 닭고기 살을 발라주시던 할머니는 모가지 아니면 앙상한 몸통뼈 사이의 살을 발라 드셨다. 언젠가 ‘할머니는 왜 거기만 먹어? 이게 훨씬 맛있는데!’ 우쭐대며 물었더니 ‘너도 어른 되면 여길 더 좋아할 거야~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 말씀처럼 어른이 되니 지금에서야 그 닭고기 맛이 어땠을지 진실로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저 손 놓고 할머니의 ‘닭고기 해체쇼'를 관람할 뿐. 할머니가 찢어주신 닭고기는 소금과 후추를 섞은 것에 찍어 먹거나 가끔은 머스터드, 할머니 고추장에도 찍어 먹었다.


닭고기를 다 먹으면 부른 배를 쥐고 온 집안을 뛰어다녀야 한다. 억지로라도 소화를 시켜야 후식을 먹고 저녁에 맛있는 볶음밥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닭고기도 대단하지만 이 중화식 돼지고기 야채 볶음밥과 된장찌개는 할머니 요리 솜씨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돼지고기와 온갖 야채들을 아주 잘게 썰어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바삭바삭할 정도로 볶는다. 기름을 약간 걷어 버리고 그 위로 한 김 식은 밥을 넣어 달달 볶는다. 소금과 후추 정도의 간결한 양념을 한 후, 반숙 프라이를 따로 부쳐둔다. 널따란 접시에 산처럼 볶음밥을 쌓고 그 위로 반숙 프라이를 올리면 볶음밥 완성. 야채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어린 시절에도 프라이팬 바닥을 긁어먹을 정도로 좋아하던 요리였다. 그리고 이 볶음밥과 함께 빠질 수 없는 매콤한 간의 된장찌개. ‘담북장'이라 불리는 직접 만드는 집 된장을 사용하셨는데, 된장과 고추장을 조금씩 섞고 청양고추도 가위로 툭툭 썰어 넣어 투박하게 끓인 된장찌개다. 집 된장, 손두부, 직접 키우신 고추, 시골에서 가져온 호박으로 만들어주셨던 칼칼한 된장찌개. 매운 것을 못 먹는 어린아이였지만 할머니 된장찌개만큼은 마다하지 않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기름진 볶음밥에 매콤한 된장찌개 한 스푼이면 세상 진미 부럽지 않았다. 저녁까지 먹고 나면 할머니 무릎에 누워 토요 연속극을 함께 보는 것이 이 완벽한 토요 코스의 마무리.

 

이렇게 좋아하던 ‘할머니표 정식'은 할머니의 기나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면서 끝이 났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몹쓸 병의 존재를 알게 되셨다. 그 후 몇 번의 치료와 수술을 거듭하셨고, 오랜 시간 잘 견뎌주셨지만 몇 해 전 편안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유일했던 조부모님이 영영히 떠나셨다는 걸 오래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느 날, 문득 할머니표 정식이 떠올랐다. 갑자기 할머니의 볶음밥과 된장찌개가 사무치게 그리워, 옆에서 본 대로 나름의 흉내를 내봤지만 그 맛을 재현하는데 실패했다.


할머니 집에서 받아오지 못한 ‘담북장'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할머니만의 비계가 있었던 걸까?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닫고 씁쓸하게 (실패한) 할머니표 정식을 먹는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재료를 완전히 갖춘다 해도 온전한 할머니표 정식 맛은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할머니표 정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 할머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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