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 2.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야기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여정, 죽음과 재생, 희생과 구원, 배신과 복수’ 같은 사건들이 매 라운드마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청자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불안과 기대, 슬픔과 희망, 감동과 분노를 강렬히 경험하며, 생존 전략을 배우게 된다.
<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은 한 차례 게임을 포기하고 살아남지만, 곧 현실의 삶이 더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의 게임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평범한 인물이 자발적으로 시련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이 순간, ‘여정’이란 사건 원형이 시작된다. 시청자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묘한 기대를 품는다. 이런 감정 속에서 시청자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는 생존 전략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한다. 여정 원형은 고전적인 영웅의 모험처럼 전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작품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추락의 여정
월터는 마약 제조와 범죄의 세계로 들어서며 점차 타락의 길을 걷는다. 그의 여정은 성장과 구원이 아닌, 추락의 여정이다.
·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복수의 여정
에렌의 출발은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영웅의 여정이지만, 결국 다른 세계를 몰살시키려는 복수와 파괴의 여정으로 폭주한다.
·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강제된 여정
조엘과 엘리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여정을 떠나지만, 조엘은 인류의 구원이 아닌 개인적 집착을 선택하며 여정을 바꿔 버린다.
이처럼 여정 원형은 성장의 길이 되기도 하고, 타락·복수·집착의 길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든, 여정은 늘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지를 드러내는 강력한 사건 원형이다.
기훈은 끝내 우승자로 살아남지만, 그것이 곧 구원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는 동료들을 모두 잃은 죄책감과 허무 속에서, 게임에 참여하기 전보다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붉은 머리로 염색한 모습은 재탄생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죽음의 흔적이기도 하다. 시청자는 그의 모습을 보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기훈은 출국 직전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발길을 돌린다. 이 선택은 그의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암시하며, 시청자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 그리고 ‘완전한 회복은 없을지라도 다시 시작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존 전략을 배우게 된다.
· 영화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 Part 2>|해리
해리는 볼드모트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부활한다. 이 장면은 두려움과 한계를 넘어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을 상징한다.
· 드라마 <왕좌의 게임>|존 스노우
존 스노우는 배신자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지만, 붉은 여사제의 힘으로 다시 되살아난다. 공동체는 그의 부활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시 짊어진다. 이 장면은 절망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재생의 힘을 상징한다.
이처럼 죽음과 재생의 원형은 단순히 목숨을 되찾는 사건이 아니다. 절망을 통과한 뒤,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뚜렷한 희생의 원형은 지영에게서 드러난다. 구슬 게임에서 새벽과 한 팀이 되었을 때, 지영은 자신이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 희생을 택한다. 그리고 새벽이 다음 라운드로 나가도록 구원한다. 시청자는 이 장면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진정한 감동을 경험한다.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생존 전략은 분명하다. ‘개인의 생존을 넘어, 타인의 삶을 지켜내는 희생이 공동체를 이어가게 한다.’
반면 알리와 새벽의 죽음은 조금 다르다. 알리는 상우의 배신에 속아 탈락했고, 새벽은 부상과 상우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자발적 희생이 아니라 강제된 희생자다. 그럼에도 이들의 죽음은 강력한 의미를 남긴다. 알리의 죽음은 신뢰와 배신의 잔혹함을 드러내고, 새벽의 죽음은 기훈에게 분노와 책임감을 남겨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시청자는 이 과정을 통해 ‘맹목적 신뢰는 생존에 치명적이다.’, ‘혼자만의 생존은 공허하다.’라는 생존 전략을 배우게 된다.
·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렌고쿠
렌고쿠는 혈귀와 맞서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동료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결국 쓰러지지만, 그 희생 덕분에 동료들은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 드라마 <왕좌의 게임>|호도르
호도르는 화이트 워커 무리에 쫓기는 브랜과 일행을 탈출시키기 위해 스스로 문을 잡고 버틴다. “Hold the door!”라는 외침 속에 일행은 살아남지만, 호도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테스
테스는 조엘과 함께 엘리를 안전하게 데려가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고 감염자들이 들이닥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엘과 엘리가 도망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감염자들을 막아선다.
이처럼 희생의 원형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지만, 그 죽음은 그저 끝이 아니라 타인을 살리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구원의 힘으로 변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는 상우가 알리를 배신하는 장면이다. 구슬 게임에서 두 사람은 한 팀이 되어 함께 살아남자고 약속하며 신뢰를 쌓는다. 그러나 게임이 막바지에 이르자 상우는 규칙을 교묘히 이용해 알리를 속이고, 끝까지 그를 믿었던 알리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시청자는 단순한 놀람을 넘어 깊은 분노와 충격을 경험한다. 집단에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배신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Tomasello, 2009). 시청자는 상우의 행동을 보며 ‘믿음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배신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존 전략을 학습한다.
동시에 배신은 언제나 복수를 불러온다. 복수는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고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려는 본능적 반응이다. 심리학 연구에서는 복수가 ‘배신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신호를 집단에 남겨 협력을 회복시킨다고 본다. 또한 피해자 역시 복수를 통해 무력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McCullough et al., 2013). 이 맥락에서 보면, 마지막에 출국 직전 발길을 돌린 기훈의 선택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게임 시스템을 향한 복수의 예고다. 우승했음에도 여전히 절망 속에 살아가는 그는, 무너진 질서를 회복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몸소 보여준다. 결국 배신과 복수의 원형은 같은 교훈을 남긴다. ‘생존을 위해서는 신뢰를 소중히 여기되, 그 신뢰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신과 복수는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사건 원형 중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되풀이된다.
· 드라마 <왕좌의 게임>|피의 결혼식
결혼식은 보통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리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시청자의 신뢰가 철저히 배신당한다. 롭 스타크가 프레이 가문과의 혼인 약속을 깨면서 신뢰가 무너지고, 프레이 가문은 이 배신을 잊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결혼식 자리는 순식간에 학살의 무대로 바뀌고, 스타크 가문은 몰락한다. 시청자는 이 사건을 통해 ‘배신은 또 다른 배신과 복수를 부른다.’, ‘배신은 공동체 전체의 파국으로 이어진다.’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 드라마 <나르코스>|파블로 에스코바르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배신이나 도전에 반드시 잔혹한 보복으로 응수한다. 그의 복수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배신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라는 신호를 콜롬비아 전역에 새기며 권력 유지의 수단이 된다. 하지만 복수는 다시 돌아온다. 경쟁 카르텔과 경찰, 정치 세력 모두가 저마다의 복수를 위해 끝까지 그를 추적한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놀이 문화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속에는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 있다. 가면을 쓴 VIP는 거인·좀비·화이트 워커의 또 다른 얼굴이고, 기훈은 해리·프로도·탄지로처럼 ‘평범한 자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인물’의 변주다. 지영의 죽음은 렌고쿠와 호도르의 희생과 겹치고, 상우의 배신은 ‘피의 결혼식’처럼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공감하고 반응하는 보편적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연출자는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과 그 안에 새겨진 원형을 적극적으로 끌어와야 한다.
Comment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기획과 편집 단계에서 사건 원형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언제나 미션으로 ‘여정’을 시작하고, 멤버들 간 ‘배신과 복수’, ‘희생과 구원’을 반복하며, 탈락하고 부활하는 ‘죽음과 재생’의 사건 원형을 따른다. <더 지니어스>와 <피의 게임>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배신과 복수’, ‘희생과 구원’의 원형이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나는 솔로> 같은 연애 프로그램에서도 사랑과 배신, 신뢰 회복의 원형이 끊임없이 드러난다. 시청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특정 출연자를 신뢰하거나, 배신자로 규정하며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영웅, 그림자, 멘토, 트릭스터…. 원형은 단순한 캐릭터 장치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 감정을 자극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같은 영웅이라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을 때와 군중의 환호를 받을 때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그림자라 해도 카메라가 멀리서 잡을 때와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긴장의 깊이가 달라진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건 ‘위기–노력–결과’라는 뼈대 위에 ‘원형’으로 살을 붙여 ‘이야기’라는 형체를 세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형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려면 ‘감정’이라는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연출자의 힘은 바로 그 감정을 완성하는 장면 연출에서 드러난다. 이제 이야기를 넘어, 장면 설계라는 더 구체적인 세계로 들어가 보자.
3줄 요약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 구조에 몰입하는 이유는 집단 무의식 속 원형 때문이다. 융이 말한 영웅·그림자·멘토·트릭스터 같은 인물 원형과, 여정·희생·복수 같은 사건 원형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반복됐다. 원형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감정을 불러내며 이야기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