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2.
‘위기–노력–결과’라는 이야기 구조가 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을 순 없다. 인류는 언제나 이 틀 위에 특정한 인물과 사건을 반복적으로 덧붙여 왔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속에 새겨진 ‘원형(archetype)’의 반복이다. 그래서 장르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얼굴,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만나며 똑같이 열광한다. 이제, 집단 무의식과 원형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집단 무의식’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기억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태어난단 말인가? 뭔 소린가 싶겠지만, 사실 별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뱀을 본 적 없어도 움찔하며 두려워한다. 캄캄한 방에 혼자 있으면 울음을 터뜨리고, 따뜻한 품에 안기면 곧바로 안정을 찾는다. 이런 반응은 배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원시 시대의 인류는 어둠 속 포식자에게 수없이 위협받았고, 뱀의 공격을 피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반대로 어머니의 품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런 생존 경험이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적으로 쌓였고, 결국 본능적 반응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집단 무의식은 곧 수십만 년 동안 쌓인 생존의 기억을 담은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사람들은 이 도서관을 통해 각자의 경험과 상관없이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그 서가에는 ‘어둠은 위협, 어머니는 보호’ 같은 반복된 경험이 책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그 책들이 바로 ‘원형’이다. 이렇게 쌓인 생존의 기억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그만큼 원형의 유형도 다양하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통해 원형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오징어 게임>은 한국 드라마지만, 전 세계 시청자가 즉각 이해하고 몰입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작품의 인물들이 집단 무의식 속 ‘인물 원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는 ‘영웅, 멘토, 그림자, 트릭스터’ 같은 인물 원형이 등장하고, 이들이 나아갈 때마다 시청자는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며, 동시에 생존 전략을 배우게 된다.
사회의 낙오자인 기훈은 처음엔 무책임하고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잔인한 게임을 끝까지 버텨내며 영웅의 길을 걷는다. 영웅 원형은 언제나 ‘약자가 시련 속에서 점차 강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훈은 이 과정을 따라가며, ‘위기–노력–결과’ 구조를 충실히 구현한다. 시청자는 그의 시련을 보며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약자도 끝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기훈의 선택과 행동을 지켜보며 ‘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판단과 전략이 필요한지’ 배우게 된다. 그래서 이런 영웅 원형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되풀이된다.
·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렌
에렌은 거인이라는 절망적인 시련 속에서 점차 강해지며 영웅으로 성장한다.
·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탄지로
탄지로는 가족을 잃은 깊은 상처를 안고도 희망을 잃지 않고 혈귀와 싸워 나간다.
· 애니메이션 <원피스>|루피
루피는 해적왕이라는 무모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동료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 영화 <반지의 제왕>|프로도
프로도는 평범한 호빗이지만, 세상을 구하는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끝까지 여정을 완수한다.
<오징어 게임>의 빌런은 가면을 쓴 게임 관리자들과 VIP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무시하고, 오직 쾌락을 위해 사람을 소비한다. 이런 빌런을 융의 용어로 ‘그림자’라 부른다. <오징어 게임>에서 그림자 원형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억압과 파괴를 상징하는 집단적 힘이다. 시청자는 이들을 보며 단순히 나쁜 놈들이라 느끼기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사회의 탐욕과 폭력성을 함께 떠올린다. 그래서 이들을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공포·혐오·분노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 동시에 ‘이런 힘 앞에서 나는 어떻게 저항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생존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그림자는 언제나 영웅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영웅 원형이 되풀이되듯, 그림자 원형도 다양한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된다.
· 드라마 <워킹 데드>|좀비
이름조차 없이 몰려오는 좀비 떼들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 드라마 <왕좌의 게임>|나이트 킹·화이트 워커
북부 장벽 너머에서 몰려오는 나이트 킹과 화이트 워커는 멸망의 공포를 상징한다.
· 애니메이션 <몬스터>|요한
요한은 이유 없는 살인과 조종, 파괴를 일삼으며, 그 존재 자체가 ‘순수악’이다.
·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마키마
마키마는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을 무기로 사람을 지배하는 악마다.
오일남은 그저 약해 보이는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기훈 곁에서 따뜻한 조언을 건네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해 함께 위기를 넘긴다.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그를 지혜로운 멘토이자 보호자로 받아들이며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후반부에 드러나는 그의 정체는 충격적이다. 존경과 신뢰는 곧 배신감과 분노로 뒤집히고, 시청자는 멘토라는 원형이 얼마나 쉽게 그림자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이 과정을 통해 시청자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언제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가?’라는 인간관계의 생존 전략을 배우게 된다. 이처럼 멘토 원형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상황과 선택에 따라 끝까지 영웅의 조력자로 남기도 하고,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처럼 그림자로 변하기도 한다. 멘토 원형의 매력은 이런 양면성에 있다.
· 영화 <해리포터>|덤블도어
끝까지 해리 곁에 남아 지혜를 전하고 길을 밝혀준다. 그의 존재는 시청자에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이라는 안정감을 준다.
·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우로코다키 사콘지
탄지로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지만, 동시에 그들 남매를 따뜻하게 보살핀다.
·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월터 화이트
제시의 스승으로 등장하지만, 점차 권력과 욕망에 휘둘려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추락한다.
트릭스터는 ‘속임수꾼’이라고도 한다. 속임수와 기묘한 선택으로 질서를 흔들고, 예측을 깨뜨리는 인물이다. 상우는 동료를 배신함으로써 ‘우정과 신뢰’라는 규칙을 무너뜨리고, 새벽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다. 덕수는 폭력으로 게임 자체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들은 모두 시청자에게 불안과 긴장을 안기지만, 동시에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이야기에 몰입시킨다. 시청자는 이들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이 만든 혼돈 속에서 ‘위험한 상황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 수 있는지, 그 변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때로는 속임수조차도 생존 전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 애니메이션 <주술회전>|료멘스쿠나
료멘스쿠나는 혼돈과 위협의 화신이다. 그는 언제나 주인공 이타도리의 내면을 흔들며,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 요소로 긴장을 만들어낸다.
·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제시
제시는 월터의 제자지만, 예기치 않게 그의 계획을 끊임없이 어그러뜨리는 변수다.
·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조엘
조엘은 영웅과 트릭스터의 경계를 넘나들며, 엘리를 지키는 보호자이면서도 동시에 이기적인 선택으로 이야기를 뒤흔든다.
Comment
예능과 교양에서 흔히 ‘케미가 맞는 출연자’를 섭외했다고 말한다. 이때의 ‘케미’는 단순히 서로의 친밀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캐릭터가 서로 맞물려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융이 말한 ‘영웅, 그림자, 멘토, 트릭스터’ 같은 인물 원형은 수천 년 동안 그 케미를 입증해왔다. 그래서 출연자 섭외와 프로그램 포맷 설계에서 원형은 강력한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프로듀스 101>이나 <스트릿 우먼 파이터>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언제나 시련 속에서 점차 강해지는 ‘영웅’ 원형이 존재하며, 그들이 시청자 투표 1위를 차지한다. 또한, 특정 출연자를 대놓고 욕받이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림자’ 원형 대신 ‘트릭스터’ 원형을 활용한다. 트릭스터가 주는 혼란만으로 시청자는 출연자를 ‘빌런’으로 인식한다. 여기에 출연자를 이끄는 심사위원은 ‘멘토’ 원형을 담당한다. 최근 <나는 솔로> 같은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를 주로 ‘트릭스터’로 채운다. 그러면 시청자는 욕하면서도 시청을 멈추지 못하고, 동시에 ‘나는 어떻게 연애해야 할지’ 생존 전략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