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1.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렵다.
프랭크 대니얼 : D.하워드·E.마블리, 『시나리오 가이드』, 심산 옮김, 한겨레출판, 1999, p.43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는 사람이 되려고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는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죄를 씻기 위해 난이도 극악인 12 과업을 수행한다.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는 하늘로 돌아가려고 애를 둘이나 낳고, 《춘향전》의 춘향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옥에 갇힌다.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여정이 이렇게나 험난하다. 지금은 어떨까?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너무나 거대해서 밸붕이 돼버린 절대 악과 싸운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죽기 직전까지 싸우며, 심지어는 죽었다 살아나기도 한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임솔 역시 사랑하는 선재를 지켜내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는다. 이제는 사랑을 지키는 것도 ‘험난’의 정도를 아득히 넘어섰다. 어쨌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에서 영화까지 강렬한 이야기 대부분은 이 구조를 따른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렵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공식은 시대와 장르를 넘어, 인류가 반복해서 몰입해 온 이야기의 뼈대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런 이야기 구조에 반복해서 꽂히게 된 걸까?
‘살아남기 위해서’다. 원시 환경 속 인류는 끊임없이 위험에 직면했다. 맹수에게 쫓기고, 먹이를 사냥하며, 부족 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은 언제나 ‘험난하지만, 반드시 이겨내야 할 미션’이었다. 이런 경험이 세대를 거듭해 누적되면서, 인간의 뇌 속에는 자연스레 ‘위기–노력–결과’라는 패턴이 새겨졌다. 그리고 미션 성공을 위한 인간의 행동 본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는 방법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직접 위험을 겪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류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를 만나면 불을 써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짤막한 정보는 금세 잊혔다. 인간은 맥락 없는 정보보다 원인과 결과로 이어진 이야기를 훨씬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Schank & Abelson, 1977). 그래서 이야기가 등장했다.
“예전에 족장님이 숲에서 호랑이를 만났지(위기). 처음엔 창으로 싸우려 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어(노력). 대신 불탄 나뭇가지를 흔들었더니, 호랑이가 겁을 먹고 달아났단다(결과). 기억해라, 호랑이를 만나면 불을 쓰는 거야. 그게 살길이다.”
이렇게 인과 구조를 갖춘 이야기, 특히 ‘위기(발단)–노력(전개)–결과(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 패턴이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동반한 경험은 그렇지 않은 경험보다 훨씬 선명하고 오래 기억된다(Cahill & McGaugh, 1995). 특히 이야기의 결과에 대한 예측이 맞아떨어지면 도파민이 분비되어 학습 효과까지 강화된다. 즉,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학습과 쾌감이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기–노력–결과’ 패턴에 인간이 반복적으로 끌리는 근본적인 이유다.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이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 <귀멸의 칼날>에서 쓰러진 탄지로가 다시 일어서는 순간, <슬램덩크>에서 마지막 슛이 림을 통과하는 순간, 시청자는 ‘위기-노력-결과’ 구조가 주는 쾌감에 전율하며, 생존 전략을 학습한다. 그리고 이 구조는 프랭크 대니얼이 정리한 단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렵다.
인지 고고학 연구는 인류가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시점을 수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Mithen, 1996).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위기–노력–결과’라는 패턴은 이야기 속에 반복적으로 새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구조에 본능처럼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같은 구조라 해도 세상에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르다. 뼈대가 같아도 체형이 제각각인 것처럼, ‘위기–노력–결과’라는 뼈대 위에 어떤 살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 뼈대 위에 어떤 인물과 사건을 쌓아왔을까? 다음 장에서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야기 속에 반복해온 ‘집단 무의식’과 ‘원형’에 대해 살펴보겠다.
3줄 요약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기–노력–결과’ 구조에 끌린다. 이 서사 구조는 생존 경험이 각인된 결과이며, 감정과 보상을 통해 학습 효과를 높여 오늘날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