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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변

<본능적 연출> 프롤로그

by 정영택

이 연재글은 출간 예정 도서 《본능적 연출》의 일부입니다.



내게도 이 책을 쓰게 된 숭고하고 멋진 이유가 있었다면 좋았겠다. 하지만 나를 움직이게 한 태반의 일들은 동기가 불순하다. 이 책 역시 그렇게 시작됐다.


2005년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으로 타인의 평가를 받는 영상들을 만들게 됐다. 어떻게 더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지 고민하며 몰두했던 밤들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사’라는 과정은 달랐다. 함께 모여 앉아 더 나은 영상을 위해 의견을 나눠야 할 시간은, 내 경우엔 어찌 된 일인지 지시와 명령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하나같이 “쳐지니까.”, “지루하니까.”, “재미없으니까.”라는 이유로 며칠 밤을 새워 고민했던 결과들을 난도질했다.

화가 났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자신들만의 ‘감’을 밀어붙인다는 것. 그 ‘감’이란 것도 도통 기준이 없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 결국엔 자리가 깡패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겨, 그들의 지시대로 납득하지도 못한 채 뜯어고치게 된다는 것. 그렇게 나를 침식해 가는 무력감과 좌절감. 그 모든 것들에 화가 났다. 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나를 방어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건 ‘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이유를 대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지 않고 모두가 수긍할 보편적인 ‘기준’,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필요했다. 결국, 연출자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개인적인 이유로 연출 기법이 아닌 진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은 ‘사람’이었다.


‘시청視聽’ 즉, 영상을 보고 듣는 시청자는 결국 ‘인간’이다. 영상을 만드는 연출자도 ‘인간’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따라서 모두가 수긍할 보편적인 ‘기준’ 역시 인간에게 있을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그런 기준이 있다면 ― 즉, 인간에게 세상을 보는 공통된 원리나 방식이 있다면, 이를 활용해 시선을 끄는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는 공통된 원리나 방식이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의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간을 집중시키는 보편적인 이야기 구조가 있다면, 이를 활용해 몰입을 이끄는 영상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영상을 만드는 사람은 ‘인간’을 알아야 한다.


다행히 인간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학문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인간의 보편적 기준에 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꾸준히 발전해 왔고, 하나의 학문 체계로 자리 잡았다.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는 지각심리학과 신경과학이 설명하고,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인지심리학이, 왜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진화심리학이 밝혀 준다. 정신분석학은 자신도 잘 모르는 보편적인 마음의 기준까지 알려준다. 이미 인간의 본능을 활용해 보편적인 반응을 끌어낼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유용한 학문들을 영상 연출에 접목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원리를 알아야 응용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데, 서점에 꽂혀있는 영상 연출에 관한 책들은 대개 응용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수많은 연출 이론과 기법, 영상 문법은 결국 ‘인간의 본능’을 보기 좋게 정리한 것들일 뿐이다. 그래서 본능에 대한 원리와 그 기원을 알게 되면, 사실 그런 것들은 하나하나 외울 필요가 없다. 아는 것을 넘어 이해하는 차원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개개인마다 다르다 여겨졌던 ‘감’이란 것도 결국 인간의 본능이기에 ‘왠지 그런 것 같아.’가 아니라, 확실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서 막연하기만 했던 감이 명확해진다. ‘감이 없음’을 자책하며 실체도 없는 감을 키우려 애쓰고 있었다면, 인간의 본능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성능 확실한 길이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도록, 심리학이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20년 현장을 경험한 PD의 눈으로 ‘심리학 연출론’을 정리했다. 딱딱한 글은 좋아하지 않지만, 학문을 다루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글이 조금 무겁다. 그래도 예능 PD 출신이라 최대한 쉽게 풀려고 애썼다. 예시로 든 작품들도 두 번 이상 찾아볼 만큼 즐겁게 본 영상들이다. 대부분 넷플릭스 등 OTT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타임코드를 기재했다. 또한 유튜브 채널 [다이브캐스트]에도 참고할 만한 관련 영상들을 모아두었다. 작품 스틸컷을 쓸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저작권 문제로 다른 사진들로 대체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 이 책을 통해 연출자든 시청자든, ‘영상을 이렇게도 접근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든다면, 그제야 기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PD로서의 삶, ‘나쁘지 않았다’고.




https://youtu.be/x8SHXR2_4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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