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3.
이야기가 아무리 거대하고 원형이 아무리 보편적이라 해도, 시청자는 결국 하나의 장면을 실제로 봐야지만 감정을 느낀다. 따라서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시청자의 감정 경험을 결정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면 설계에 대해 논하기 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대체 우리는 왜 연출을 하는가?
물론 영상의 기획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다. 전작 《방송 연출 기본기》에서 나는 연출을 이렇게 정의했다. ‘연출이란 하려는 이야기에 끝까지 몰입시켜 의도를 이루는 작업이다.’ 이는 운동 경기와도 비슷하다.
감독은(=연출자는), 승리를 위해(=의도를 이루기 위해), 전술에(=하려는 이야기에), 선수들이 끝까지 따르도록 한다(=끝까지 몰입시킨다).
《슬램덩크》에서 산왕을 꺾기 위해 안 선생님이 짠 전술을 떠올려보자. 송태섭은 압박 수비를 뚫고, 정대만과 서태웅은 공격을 이끌며, 채치수와 강백호는 골밑과 리바운드를 장악한다.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하면 20점 차라는 극악의 상황도 뒤집을 수 있지만, 단 한 명이라도 무너지면 게임은 끝이다.
연출도 그렇다. 영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선수’다. 북산의 다섯 선수가 모여 전술을 완성하듯, 장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북산이 그랬듯, 한 장면이라도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몰입은 깨지고 기획 의도는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연출자는 안 선생님처럼 각 장면에 명확한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완수하려면 시청자를 장면에 몰입시켜야 한다. 즉,
장면 설계란 연출자가 설정한 장면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시청자가 몰입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장면의 역할은 뭘까? 이야기에 몰입시키기 위해 장면이 달성해야 할 목표다. 전작 《방송 연출 기본기》에서 예로 들었던 《흥부전》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흥부가 형수에게 밥을 구걸하자, 형수는 밥 푸던 주걱으로 흥부의 뺨을 친다. 그리고 흥부는 뺨에 붙은 밥풀을 떼서 먹는다.
《흥부전》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착한 흥부가 대박 나서, 자신을 괄시하다 패가망신한 못된 놀부마저 관대하게 용서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다. 이 기획 의도를 실현하려면 시청자를 이야기에 몰입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흥부는 철저한 피해자, 놀부는 철저한 가해자가 돼야 한다. 흥부가 호되게 당할수록 시청자는 놀부가 망하기를 바라며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부에겐 연민을, 놀부에겐 분노를 느끼게 하라!’라는 장면의 역할이 설정됐다. 이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선택된 행동이 바로 ‘주걱 싸대기’다. 이로써 몰입감 있는 장면이 완성됐다. 이렇게 성공적인 장면 설계를 위해 던져야 할 첫 질문은 이것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의 몰입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당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많은 연출자들이 첫 질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뭘 찍지?’, ‘어떻게 찍을까?’, ‘뭐부터 붙이지?’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대개 재촬영이나 재편집이다. 이를 피하려면 먼저 장면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방법은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이 장면은 시청자를 느끼게 해야 해?
· 이 장면은 시청자를 생각하게 해야 해?
· 이 장면은 인물을 이해시켜야 해?
· 이 장면은 시청자를 즉각 반응하게 해야 해?
이런 고민을 거치면 장면의 역할이 명확해진다. 다음 단계는 비교적 간단하다. 시청자가 몰입할 수 있도록 장면을 구성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촬영과 편집 방식을 정하면 된다. 그러면 각 장면의 역할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완수되고, 그 결과 전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며, 마지막 도미노가 쓰러질 때 기획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성공한 연출이다. 물론 이 과정에 정답이나 공식은 없다. 다만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몰입 전략들은 있다. 이 전략들은 장면의 역할을 완수할 때도, 이야기 구조를 설계할 때도 유용하다.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그 전략들을 하나씩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