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4.
장면의 역할을 정했다면, 이제 그 역할을 완수하도록 시청자를 몰입시켜야 한다. 우선 ‘몰입’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몰입을 ‘깊이 파고들거나 빠짐’이라 정의한다. 전작 『방송 연출 기본기』에서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시청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 설명했다. 결국 몰입되는 장면이란, 시청자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런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미 살펴본 전략들이 있다. 시청자를 느끼게 하거나(감정적 몰입), 생각하게 하거나(인지적 몰입), 인물을 이해하게 하거나(관점 몰입), 혹은 즉각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반응 유도형 몰입). 그리고 이 모든 전략의 출발점은 ‘감정’이다. 기쁨이나 슬픔이 공감을 유도하고, 호기심은 추측하게 하며, 공포와 놀람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즉, 감정을 먼저 자극해야 몰입이 시작된다. 따라서 시청자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만들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
다시 《흥부전》의 ‘주걱 싸대기’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이번엔 《흥부전》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이 장면을 본다고 상상해 보자.
흥부가 형수에게 밥을 구걸하자, 형수는 밥 푸던 주걱으로 흥부의 뺨을 친다. 그리고 흥부는 뺨에 붙은 밥풀을 떼서 먹는다.
외국인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뭐지, 이 상황은? 어떻게 주걱으로 귀싸대기를 날리지? 저 남자는 왜 화도 안 내고 밥풀을 떼먹지? 거진가? 둘은 무슨 사이지? 좀 더 지켜보자.’ 그는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추측하며 몰입하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를 몰입하게 했을까? 바로 놀람이라는 ‘감정’이다. 갑작스러운 주걱 싸대기는 그를 놀라게 했고(반응 유도형 몰입), 이어지는 낯선 상황은 호기심을 자극해 인물 관계를 추측하게 만들었다(인지적 몰입). ‘주걱 싸대기’란 행동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주걱 싸대기(행동) = 뜨겁다 + 아프다(감각) ➝ 놀람(감정) ➝ 의문(몰입의 시작)
뜨거운 주걱으로 싸대기를! 얼마나 아플까! 이게 뭔 일이래? 감각이 감정을, 감정이 의문을, 의문이 몰입을 만든다. 이것이 몰입의 과정이다. 따라서 장면을 설계할 때는 늘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① 이 장면에서 어떤 감정을 유도할 것인가?
② 그 감정을 어떤 행동을 통해 표현할 것인가?
③ 그 감정을 느끼게 할 감각적 단서는 무엇인가?
이제 연출자의 시선으로 ‘주걱 싸대기’ 장면을 다시 보자. 이 장면의 역할은 ‘흥부에겐 연민을, 놀부에겐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싸대기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달성했지만, 더 강한 몰입을 위해서는 시청자가 흥부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러려면 흥부의 슬픔·수치심·서러움·절박함이란 ‘감정’을 함께 느끼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출자는 밥을 구걸하고, 뺨에 붙은 밥풀까지 떼어 먹는 ‘행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흥부의 궁색한 표정과 몸짓(시각), 형수의 싸늘한 말투(청각), 뜨거운 밥풀과 뺨의 통증(촉각) 같은 ‘감각적 단서’를 배치했다. 이 과정을 토대로 정리하면,
장면 설계란 장면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시청자가 특정 감정을 느끼도록 감각적 단서를 배치해 몰입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 결과 연출자는 시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기획 의도를 실현하며, 궁극적으로 시청자를 행동하게 만든다. 결국 연출의 성패는 장면 설계에 달려 있고, 그 출발점은 언제나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감정의 설정이다. 그래서 연출을 하려는 우리는 ‘감정’에 대해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Comment
편집 시 무엇을 붙여야 할지 막막하다면, 먼저 이 에피소드가 전체 이야기에서 맡을 역할을 생각하자. 예컨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편집한다고 치자. 내가 맡은 에피소드는 출연자가 실패하는 장면이고, 다른 PD가 맡은 에피소드는 출연자가 다시 연습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내가 맡은 장면의 역할은 ‘출연자의 각성’이다. 실패로 충격을 받아 각성해야, 다음 장면에서 출연자가 다시 연습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할이 정해졌다면, 이제 시청자가 느낄 감정을 떠올리자. 출연자를 응원하게 만들려면 시청자가 ‘연민’을 느껴야 한다. 이를 위해 출연자가 실제로 경험할 감정을 생각하자. 실패로 인한 ‘좌절감·수치심·슬픔’ 같은 감정을 느껴야 시청자가 응원한다.
다음은 그 감정을 보여줄 행동을 찾는 단계다. 예컨대 촬영본에서 ‘밥을 먹다 눈물을 흘리는 행동’을 고른다. 그리고 그 행동 속 감각적 단서를 붙인다. 스르륵 흘러내려 식판에 떨어지는 눈물(시각), 흔들리는 어깨(시각), 작게 흐느끼는 소리(청각)…. 여기에 마지막에 눈물 쓱 닦고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 컷까지 붙이면, 다시 열심히 연습하는 장면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