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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은 감정에서 시작된다 2

<본능적 연출> ep4.

by 정영택

이 연재글은 출간 예정 도서 《본능적 연출》의 일부입니다.



감정은 행동을 만든다


감정은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이끌어낼까? 답은 ‘인간의 인지 과정’에 있다. 인지심리학에 따르면, 일반적인 인간의 인지 과정은 보통 다음과 같은 흐름을 따른다.


감각 수용 ➝ 지각 ➝ 주의 ➝ 기억 ➝ 사고·추론 ➝ 판단·의사결정 ➝ 반응·행동 실행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속 한 장면으로 살펴보자. 에렌이 엄마를 잡아먹은 거인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이다. 여기서부터는 뇌의 특정 부위 이름 같은 어려운 용어들이 등장하겠지만, 외우지는 말자. 연출자가 되려는 우리가 할 일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1. 1단계, 감각 수용|‘거대한 형체’가 눈앞에 들어온다


큰 소리와 함께 거대한 형체가 에렌의 시야에 들어온다. 외부 자극(빛·소리 등)은 감각 기관(눈·귀 등)을 거쳐 신경 신호로 변환되고, 곧바로 뇌로 전달된다. 시각 자극은 ‘망막 ➝ 시신경 ➝ 외측슬상핵(LGN) ➝ 1차 시각피질(V1)’로 향한다. 이 단계에서 에렌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른다. 단지 ‘눈앞에 거대한 형체가 있다’는 사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어간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불안·긴장

쿵쿵 울리는 발소리와 땅의 진동, 흙먼지에 가려진 검은 실루엣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제시한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시각과 청각으로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다.



2. 2단계, 지각|‘거인이다! 그런데….’


이제 전달된 신경 신호가 해석되어 의미 있는 형태로 인식된다. 거대한 형체였던 시각 자극은 시각피질(V1~V5)에서 ‘선·색·윤곽·움직임’ 같은 기본 요소로 분석된다. 이어 방추형 얼굴 영역(FFA)이 얼굴을 감지하고, 하측두피질(IT)에서 정보를 통합해 비로소 ‘거인’이라는 의미가 완성된다. ‘거인이 맞구나!’ 깨닫는 순간, 에렌의 몸은 공포로 굳어버린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놀람·공포

에렌의 굳어버린 몸을 클로즈업한다. 동시에 그의 시점에서 거인의 발부터 얼굴까지 훑어 올라가는 와이드 붐업 샷을 사용한다. 이때 시청자는 에렌과 함께 거인의 압도적인 크기와 위압감을 체감하게 된다.



3. 3단계, 주의|‘위화감! 대체 뭐지?’


이어서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온다. 전두엽의 전대상피질(ACC)이 이 위화감을 감지하고 주의를 전환한다. ‘저 거인을 더 자세히 봐야 해!’라는 신호가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로 전달되며, 다시 시각피질에 집중 명령이 내려진다.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오직 거인의 얼굴만 선명해진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혐오·몰입

거인의 입에서 눈까지를 천천히 훑는 타이트 클로즈업 붐업 샷으로, 거인에 대한 혐오와 집중을 동시에 유도한다.



4. 4단계, 기억|‘엄마를 잡아먹은 거인이다!’


집중된 시각 정보는 곧바로 과거 기억과 대조된다. 해마(hippocampus)가 과거 기억을 탐색해, 지금 눈앞의 얼굴이 바로 ‘엄마를 잡아먹은 거인’임을 확인한다. 그 순간 편도체(amygdala)가 반응해 ‘분노·절망·공포’ 같은 강렬한 감정을 결합시킨다. 이 감정은 다시 해마를 자극해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각인시키며, 단순한 정보가 아닌 감정적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이는 곧 감정 폭발의 트리거가 된다. 이어 측두연합피질(temporal association cortex)이 맥락을 부여한다. ‘저놈은 엄마를 잡아먹은 거인이다. 그날,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그 모든 감정이 되살아난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충격

과거 엄마가 잡아먹혔던 순간을 플래시백으로 삽입해, 현재의 장면과 과거의 기억을 강하게 결합시킨다.



5. 5단계, 사고·추론|‘복수해? 도망쳐?’


강렬한 기억과 감정이 밀려들자, 에렌의 심장은 요동친다. 행동 결정을 앞둔 뇌는 곧바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저놈이 여기 있지? 복수할까? 도망칠까?’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은 감각·기억·감정 정보를 통합해 행동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한다. 이때 감정이 유발한 생리 반응 ― 심박수 상승, 호흡 변화, 근육 긴장 ― 이 사고의 방향을 이끈다. 분노로 심박이 치솟으면 맞서 싸우는 시나리오가, 공포로 몸이 움츠러들면 도망치는 시나리오가 먼저 떠오른다. 결국 뇌는 감정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에 더 빨리, 더 깊이 몰입한다. 동시에 감정은 다시 편도체를 자극해 신체 반응을 더욱 증폭시킨다. 시나리오에 몰입할수록 에렌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고, 호흡은 거칠어지며, 손끝은 저릿해진다. 동시에 그의 사고는 점점 ‘복수’라는 시나리오를 향해 달려간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혼란·분노

에렌의 동공 지진, 땀방울, 일그러진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해, 시청자가 그의 내적 혼란과 분노를 체감하게 한다.



6. 6단계, 판단·의사 결정|“내가 끝장을 내야 돼!”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정리되면, 뇌는 그중 하나를 실제 행동으로 선택한다. 복내측 전전두피질(vmPFC)은 각 시나리오의 결과를 예측하고 비교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이 판단은 단순한 이성적 계산이 아니다. 이성과 감정의 저울질이며, 대부분 감정이 우세하다. 생존이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분노에 휩싸인 얼굴로 복수 대신 냉정한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이미 에렌의 신체 반응 자체가 ‘지금이 복수할 순간’임을 증명한다. 결국 그는 외친다. “내가 끝장을 내야 돼!”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분노·결의

부릅뜬 눈, 일그러진 얼굴로 외치는 에렌을 핸드헬드 클로즈업으로 담아,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한다.



7. 7단계, 반응·행동 실행|에렌이 거인 변신을 시도한다


감정으로 활성화된 편도체와 자율신경계는 이미 신체를 전투 모드로 준비시켰다. 결단이 내려지는 순간, 뇌는 운동피질(motor cortex)로 명령을 보내 행동을 폭발시킨다. 망설임 없이 뛰쳐나간 에렌은 거인으로 변신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물어뜯는다.


· 장면 연출 포인트|감정 = 분노

미카사가 말릴 틈도 없이 달려나가는 에렌을 미디엄 투 샷으로 잡고, 이어 손을 물어뜯는 순간에는 그의 눈과 입을 타이트 클로즈업으로 포착해 분노의 결단을 시청자가 직접 체감하게 한다.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 인지 과정이다. 복잡한 뇌 용어는 잊고, 에렌에게만 집중해 보자. 그는 과정 속에서 공포·혐오·절망·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그의 몸을 굳게 만들고, 거인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맞서 싸울 의지를 끌어올렸다. 결국 에렌은 망설임 없이 복수를 선택해 ‘행동’했다. 감각 수용에서 행동 실행까지 모든 단계에 실시간으로 개입해 흐름을 바꾼 것은 무엇인가? 바로 ‘감정’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지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의 영향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1994)는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인지 과정은 감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1996)는 인지 과정이 모두 작동하기도 전에 감정 시스템이 먼저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감정은 무엇보다 빠르게 작동해 사고의 방향을 바꾸고, 판단을 밀어붙이며, 근육을 움직여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감정을 처리하는 핵심 뇌 구조, ‘편도체’가 있다. 보통 시각 정보는 ‘망막 ➝ 시신경 ➝ 외측슬상핵(LGN) ➝ 시각피질’을 거쳐 정밀하게 처리된 뒤, 해마나 편도체와 상호작용한다. 이를 ‘1차 시각경로(primary visual pathway)’라 부른다. 이 경로는 시간이 걸리지만,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성적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편도체는 이보다 훨씬 빠른 우회 경로를 갖고 있다. 바로 ‘피질하 경로(subcortical pathway)’다. 이 경로에서는 시각 정보가 시각피질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편도체로 전달된다. 반응 속도는 약 0.07~0.15초, 눈 깜짝할 사이에 위협을 감지한다. 물론 이때 들어오는 정보는 정밀히 처리된 고해상도 이미지가 아니다. 에렌이 처음에 거인을 ‘거대한 형체’로만 인식했듯, 윤곽·명암·움직임 정도만 파악된 거친 형태일 뿐이다. 그래서 유발되는 감정도 ‘공포·놀람·혐오’처럼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뇌는 피질하 경로를 1차 시각경로보다 먼저 진화시켰다. 이유는 단 하나. ‘살아남기 위해서’다.



3줄 요약

몰입은 감정에서 시작된다. 감각 자극이 감정을 일으키고, 이는 인지와 행동을 움직인다. 따라서 장면 설계의 출발점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감정의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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