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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을 설계할 것인가 1

<본능적 연출> ep5.

by 정영택

이 연재글은 출간 예정 도서 《본능적 연출》의 일부입니다.



수십만 년 전, 인류가 맨몸으로 밀림과 초원을 헤매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덤불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형체가 있다. 그것이 굶주린 맹수인지,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인지를 판단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잠깐의 여유를 부린 이들은 이미 맹수의 먹잇감이 되었고, 공포에 휩싸여 곧바로 도망친 이들만 살아남았다. 결국 뇌는 ‘느리지만 정확한 판단’보다 ‘거칠지만 빠른 감정 반응’을 선택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 증거가 바로 ‘피질하 경로’다. 편도체는 윤곽·명암·움직임 같은 거친 정보만으로도 ‘공포·놀람·혐오’ 같은 감정을 즉각 일으켜, 몸을 전투나 도망 모드로 바꾼다. 이 과정에서 진화가 가장 먼저 발달시킨 감정들을, 이 책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원초적 감정(primitive emotions)’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인간은 흔들리는 밧줄만 봐도 뱀인 줄 알고 기겁하며 도망친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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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정은 원초적 감정만 있는 게 아니다. 심리학자 폴 에크먼(1992)은 여기에 ‘기쁨’과 ‘슬픔’을 더해,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6대 ‘기본 감정(basic emotions)’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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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기본 감정들에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그에 대한 해석이 더해지면 새로운 감정이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복합 감정(complex emotions)’이다. 예를 들어 ‘절망’은 슬픔과 공포에 ‘반복된 실패’라는 상황과 ‘이젠 끝났어….’라는 해석이 더해져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질투’는 분노와 슬픔에 ‘상대가 내 것을 빼앗았다’는 해석이 더해져 형성된다. 이런 복합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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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의 ‘진화적 기능’ 항목을 살펴보면 흐름이 뚜렷하다. 원초적 감정은 개인의 생존을 지켰고, 기본·복합 감정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집단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Keltner & Haidt, 1999). 이처럼 감정은 개인적·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생존 확률을 높이는 핵심 요인으로 작동해 왔다. 그리고 수십만 년이 지난 지금, 감정은 연출 전략의 중심이 됐다.



감정의 기능


감정이 연출 전략의 중심이 된 데에는 신경과학적 근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거울신경(mirror neuron)’이다. 이 신경은 내가 직접 행동할 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걸 볼 때도 똑같이 반응한다(Rizzolatti & Craighero, 2004). 그래서 시청자는 화면 속 인물을 보기만 해도, 마치 직접 따라 하는 것처럼 공감하게 된다.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이 곧바로 시청자의 감정 체계에 반영되는 것이다. 결국 인물의 행동을 일으키는 ‘감정’을 중심에 두고 장면을 설계하는 것이, 뇌의 이런 작동 방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허나 우리는 학자가 될 것도 아니니 뇌의 작동 원리는 여기까지만 알면 됐다. 감정의 분류를 하나하나 외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들을 어떻게 연출에 활용할 것인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왜 이런 감정이 진화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원초적 감정


‘공포·분노·혐오·놀람’이란 감정은 포식자·적·유해 물질 같은 위협을 피하기 위해 진화했다. 이 감정들은 판단보다 빠르게 작동해 몸을 곧장 움직이게 하는, 생존을 위한 자동 반응이다. 다시 <진격의 거인>을 예로 들어보자.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놈들에게 지배당하던 공포를.”이란 명대사가 1화부터 대놓고 ‘공포’를 드러낸다. 식인이란 금기를 깨며 팔랑팔랑 쏘다니는 거인 캐릭터도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차용해 ‘놀람과 혐오’를 자극한다. 이로 인한 인물들의 ‘분노’는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처럼 <진격의 거인>의 모든 설정과 표현은 원초적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성적 판단을 거치기도 전에 시선을 강제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원초적 감정은 특히 도입부나 전환점에 “이것 좀 봐!” 하며 시청자의 멱살을 붙잡는 데 효과적이다.



2. 기본 감정


‘기쁨·슬픔’은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진화한 기본 감정이다. 웃음과 미소는 ‘너와 함께 있으니 좋다!’는 신호, 눈물과 한숨은 ‘나와 함께 있어 달라!’는 신호다. 거울신경은 이러한 신호에 즉각 반응해, 타인과 함께 울고 웃게 만든다. 따라서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유도하고 싶다면, 기쁨과 슬픔은 가장 직관적이고 강력한 도구다.



3. 복합 감정


‘복합 감정’ 역시 생존 전략의 일부다. 집단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집단의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 하지만 법이나 규칙만으로 강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집단의 유지를 위한 도덕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복합 감정이 진화했다(Haidt, 2003). 예를 들어 복합 감정인 ‘죄책감’은 빵을 훔치고 싶어도 행동을 멈추게 한다. 이런 감정이 없다면 모두가 도둑놈이 돼서 집단이 무너지고, 생존도 불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저렇게 배고픈데 빵 하나 훔치면 어때?’, ‘아냐. 그래도 법은 지켜야지.’, ‘나라면 훔쳤을까?’ 이렇게 복합 감정은 시청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애초에 복합 감정이라는 게, 판단 과정에서 진화한 것이라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서로 다른 감정이 충돌하며 만들어지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시키거나, 이야기 끝에 여운을 남기고 싶을 때 유용하다. 이제 정리한 감정의 기능들을 실제 연출에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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