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연출> ep5.
감정의 기능을 요약하면 이렇다. 원초적 감정은 ‘몰입을 유도’하고, 기본 감정은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하며, 복합 감정은 ‘이해와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감정의 기능을 활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3막 구조’에 단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시작–중간–끝’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는 다음과 같이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기에 특히 적합하다.
· 시작(기)|‘원초적 감정’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고, 몰입의 문을 연다.
· 중간(승)|‘기본 감정’으로 인물에 공감하게 하여,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동참시킨다.
· 끝(전/결)|‘복합 감정’으로 인물을 이해하게 하고, 장면이 끝난 뒤에도 여운을 남긴다.
이제 이 전략이 활용된 실제 연출 사례를 살펴보자.
· 영화 <살인의 추억>
(시작) 연쇄 살인 사건의 장면은 공포·놀람·혐오라는 ‘원초적 감정’을 일으켜, 시청자를 단숨에 몰입시킨다. ➝ (중간) 수사에 번번이 실패하는 형사들의 분노·슬픔이라는 ‘기본 감정’이 이어지고, 시청자는 그들의 좌절에 정서적으로 동참한다. ➝ (끝) 결국 진범을 잡지 못한 채 무너지는 형사들의 자책감·허탈감·무력감이라는 ‘복합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카메라를 응시하는 박두만의 표정. 그 해석을 시청자에게 맡겨 깊은 여운을 남긴다.
· 영화 <올드보이>
(시작) 15년간의 감금은 놀람·공포·분노라는 ‘원초적 감정’을 일으켜 몰입을 이끈다. ➝ (중간) 복수에 매달린 오대수의 분노·슬픔이라는 ‘기본 감정’에 시청자가 이입한다. ➝ (끝) 진실을 마주한 오대수의 충격·죄책감이라는 ‘복합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미도에게 안긴 오대수의 표정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시청자의 마음을 붙잡는다.
· 영화 <추격자>
(시작) 살인 장면이 공포·분노·혐오라는 ‘원초적 감정’으로 시청자를 몰입시킨다. ➝ (중간) 범인에게 감금된 지영을 구하려는 엄중호의 분노·슬픔이라는 ‘기본 감정’에 이입한다. ➝ (끝) 살해된 지영과 남겨진 지영의 딸 앞에서 느끼는 허탈·자책감이라는 ‘복합 감정’을 함께 체험한다. (마지막 장면) 도시를 비추는 롱테이크는 시청자에게 감정을 소화할 시간을 주며 여운을 남긴다.
· 영화 <기생충>의 생일 파티 장면
(시작) 가정부의 남편이 파티에 난입해 벌이는 칼부림은 놀람·공포·혐오라는 ‘원초적 감정’으로 몰입을 이끈다. ➝ (중간) 냄새에 코를 틀어막은 박 사장을 보고 모욕감을 느껴왔던 기택이 폭발하면서, 그의 분노라는 ‘기본 감정’에 시청자가 이입한다. ➝ (끝) 박 사장을 죽이고 지하실로 도망친 기택. “이곳에 있다 보면 모든 것이 아련해진다.” 갇혀버린 기택의 좌절·무력감이라는 ‘복합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기택을 탈출시킬 “그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란 편지를 반지하 집에서 쓰는 아들. 아들과 기택은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해석을 시청자에게 맡겨, 긴 여운을 남긴다.
·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처형 장면
(시작) 김수현이 살인마 장경철을 잡았다. ‘장경철은 어떻게 끝장날까?’란 공포·긴장·불안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몰입을 이끈다. ➝ (중간) “넌 이미 졌어.”라며 도발하는 장경철에게 “난 네가 죽은 후에도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라고 답하는 김수현. 그의 분노라는 ‘기본 감정’에 시청자가 이입한다. ➝ (끝) 김수현의 계획대로 장경철은 자신의 가족에 의해 처형당하지만, 복수를 끝낸 김수현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그의 허탈감·상실감이라는 ‘복합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울다 웃다를 반복하는 김수현의 모습이 롱테이크로 담겨, 복수의 의미를 시청자 스스로 해석하게 만든다(하지만 김수현 역의 이병헌은 치아가 많이 보였을 뿐, 웃은 건 아니었다고…).
위 예시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강렬한 이유는 뭘까? ‘몰입➝공감➝해소’로 이어지는 3막 구조의 감정 흐름이, ‘보고➝이해하고➝반응하는’ 인간의 인지 과정과 정확히 맞물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는 단계에서 몰입을 유도했고, 이해하는 단계에서 공감이 일어났으며, 반응하는 단계에서 감정이 해소됐다. 본능을 거스르지 않은 것이다. 3막 구조와 인지 과정을 병치시켜 보자.
‘문제 인식 = 사건 발생’, ‘문제 해석 = 사건 전개’, ‘문제 해결 = 사건 해결’. 인지 과정과 3막 구조는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3막 구조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인지 과정을 이야기로 옮겨놓은 틀일 뿐이다. 5막이든 원형 구조든, 모든 스토리텔링은 결국 인지 과정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미 살펴봤듯, 인간의 인지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의 영향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감정의 기능이 인지 과정과 정확히 맞물릴 때, 앞서 본 영화들처럼 강렬한 몰입이 가능해진다. 즉, 핵심은 이것이다.
유도하려는 감정을 시청자의 인지 과정과 제대로 맞물리게 할 것.
그래서 연출자는 스토리텔링 구조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인간의 인지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 흐름을 알면, 지금의 인지 과정과 맞물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인물에게 어떤 행동을 시킬지, 그리고 그 행동 안에 감각적 단서를 어떻게 배치할지 설계할 수 있다. 이를 모른 채 구조만 외운다는 건, ‘2×5=10’이란 답만 외우고, ‘2를 5번 더하면 10이 된다’는 원리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면 ‘3×5’, ‘4×5’ 같은 새로운 문제는 풀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낯선 장면을 연출할 때 애를 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인지 과정의 이해는 실제 연출에 어떤 도움을 줄까? 이미 우리는 <진격의 거인> 사례에서 그 연결을 엿본 바 있다. 이제는 연출자의 눈으로, 장면을 한 땀 한 땀 설계하는 과정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에렌이 엄마를 잡아먹은 거인을 다시 마주치는 장면을 연출하라!
연출자에게 미션이 떨어졌다. 장면의 역할도 명확하다. ‘거인과의 1대1 싸움으로 에렌이 가진 힘을 깨워라.’ 문제는 에렌이 지금 전투 불능 상태라는 점이다. 맨주먹으로 거인에게 달려드는 행동을 시청자가 납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에렌을 미친놈으로 만들어야겠구나….’
그가 정신을 놓을 정도로 분노에 휩싸여야 한다. 시청자가 그의 분노에 공감해야만, 무모한 싸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공감을 시키려면 일단 시청자가 에렌의 상황을 직접 겪는 듯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연출자는 에렌의 감각과 감정을 시청자가 그대로 따라가도록, 인지 과정을 기준으로 장면을 설계하기로 한다.
‘근데 처음부터 분노하면 또라이처럼 보일 텐데….’
분노가 강한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이전에 먼저 다른 강렬한 감정이 에렌을 압도해야 한다. 분노가 그 감정을 뒤집는 순간, ‘에렌이 정신을 놨구나.’ 모두가 인정할 만큼 강한 감정 말이다. 거인을 발견하는 인지 단계 전반부라 시선까지 붙잡아야 하는데, 분노만큼 강하면서 ‘감각 수용-지각-주의’ 단계와 맞물리는 감정이 뭐가 있을까? 있다! 바로 원초적 감정인 ‘공포’다. 에렌에게 ‘당장 도망쳐!’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공포를 시청자도 함께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한 컷으로 공포를 표현할 순 없겠구나. 공 좀 들여야겠다.’
이제 연출자는 에렌이 공포를 느끼는 장면을 ‘감각 수용-지각-주의’ 단계별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감각 수용’ 단계는 감각만 받아들였지, 그것이 뭔지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거인을 흙먼지 속에서 정체 모를 거대한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시켰다. 다음, 그것이 뭔지 알게 되는 ‘지각’ 단계에선 거인임을 알아보자마자 경직된 에렌의 몸을 표현했다. 경직은 놀람과 공포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다음, 집중해서 제대로 보게 되는 ‘주의’ 단계에선 타이트 클로즈업으로 에렌의 좁아진 시야를 표현했다. 그것도 느리게 훑어서 거인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강조했다. 이렇게 인지 흐름을 따라 장면을 만들면, 시청자도 에렌과 똑같이 ‘공포·혐오·놀람’을 겪게 된다.
‘이제 이 감정들을 분노로 바꿔야겠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바꾸면 안 된다. 쓰나미가 모든 걸 휩쓸 듯, 엄청난 분노로 다른 감정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에렌이 정신 못 차리고 거인에게 덤벼들 수 있다. 그래서 연출자는 ‘기억’ 단계에서 거인의 정체를 폭로하기로 한다. 그리고 기억 단계에서 지금까지 얻은 시각 정보를 과거 기억과 대조하듯, 거인이 엄마를 잡아먹는 과거의 기억을 플래시백으로 시청자에게 던져버렸다. 공포 상태에서 불시에 아픈 기억을 얻어맞은 시청자는 이제 에렌의 분노에 절절히 공감하게 된다.
이제 다음 단계들인 ‘사고·추론’, ‘판단·의사 결정’ 단계에서 그가 ‘맨몸으로 복수하겠다!’란 미친 판단을 해도 상관없게 됐다. 시청자는 이미 그의 거대한 분노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연출자는 인지 과정과 감정이 제대로 맞물리는 연출로 장면의 역할 완수도, 시청자의 몰입도 동시에 성공했다.
이처럼 인간의 인지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이야기와 장면을 어떻게 구성할지, 컷의 배열과 카메라 무빙, 오디오 처리까지 모든 연출 요소에 명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를 간과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지 과정은 너무 빠르고 자동으로 일어나서, 마치 의심할 필요 없는 본능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본능은 누구나 갖고 있기에, 현장에서는 이를 그냥 ‘감’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버린다. 그리고 “감이 있네, 없네.” 하는 평가질만 오갈 뿐, 정작 탐구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실제 현장에서도 인지 과정을 고려해 장면을 설계하는 연출자는 드물다. 인지 과정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감을 무슨 수로 가르쳐? 많이 보고 찍고 붙여봐야 생기는 거지.”라는 인식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연출자가 되려는 사람들까지도 당연히 그렇게 여겨, 아무런 이의 없이 실체도 없는 ‘감’을 키우려 애쓴다.
하지만 단언컨대, 연출에서 말하는 ‘감’은 인간의 인지 과정을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키울 수 있다. ‘사람을 관찰하라.’라는 오래된 조언도 결국, 감정이 인지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고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지를 관찰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감이 없어서 힘들다.’라며 괴로워할 필요 없다.
각설하고, 이제 우리는 ‘장면이 어떤 목표를 성취할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인지’를 설정했다. 장면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마친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기억하고 실천해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를 습관으로 만들었다면 단언컨대 A급 연출자다. 믿기 어렵겠지만, 현장에는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다음 장부터는 이렇게 설정한 감정을 실제로 시청자가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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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행동을 인지 과정의 7단계로 분류해보는 연습을 하면, 어떻게 컷을 붙여야 할지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을 본다’는 행동을 인지 과정 단계별로 분류해 보자.
➀ 책 한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풀 샷(감각 수용)
➁ 책을 집어 들고 바라보는 사람의 풀 샷(지각)
➂ 책 속 특정 단어나 문장을 클로즈업(주의)
➃ 책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의 얼굴 클로즈업(기억)
➄ 글의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하는 사람의 미디엄 샷(사고·추론)
➅ 읽을지, 덮을지 고민하며 책을 자세히 보는 사람의 풀 샷(판단·의사결정)
➆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메모하는 사람의 미디엄 샷(반응·행동 실행)
이처럼 ‘책을 본다’는 단순한 행동이 일곱 컷이나 나왔다. 물론 상황에 따라 몇 컷을 생략해도 되고, 장면에 힘을 주려면 일곱 컷을 다 붙여도 된다. 만약 분류 연습이 어렵다면, 다른 사람들의 일상 행동에서 각 단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관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3줄 요약
감정은 인간이 진화시킨 생존 전략이다. 원초적 감정은 위협을 즉각 감지하게 하고, 기본 감정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며, 복합 감정은 도덕적 판단과 여운을 남긴다. 연출자는 이 감정들을 인지 과정과 맞물리게 배치해서 ‘몰입-공감-해소’로 이어지는 강렬한 경험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