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식 號에 대한) 시대정신 2 (비판)

일상 : 깨진 안경알 너머 세상 06

by 정로각심


아주 개인적 생각이다. 요즘 명함에 이름과 함께 호(號)를 표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호라는 것이 엄밀히 말하면 유교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나 문인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기에 유교의 영향 또는 전통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시대가 21세기인데, 이 시대에 유교식 전통이 유효한가라는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한다.(일단 나는 개인적으로 조선시대의 유교식 관습과 전통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전에 따르면 호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유교 문화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 지었던 이름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유교에서만 사용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유교식이 아닌 호는 있는가도 알아보는 게 좋겠다.


호의 종류는 다양하다. 별호(別號), 아호(兒號), 택호(宅號), 당호(堂號), 군호(君號), 제호(帝號), 시호(諡號), 묘호(廟號) 등 사용대상과 의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된다. 여기에 법호(法號)도 있으며,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한 아호(雅號)도 있다.


별호는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호로 주로 양반들에 의해 사용되며, 아호(兒號)는 유아기 가정에서 부르던 이름, 택호는 주로 여자에게 붙여지며 여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뭐해서 '00 댁'처럼 출신지나 거주지를 부르던 것이라고 한다. 당호는 주로 거주하던 집의 이름을 호로 사용한 경우로 '여유당(정약용 선생의 생가가 여유당이다)'처럼 사용되었다.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호의 구분이며, 관직이나 사후에 붙여지는 호도 있다. 군호는 왕자나 공신에게, 시호는 공 있는 사람에게 사후에 붙여지며, 묘호는 주로 군주에게 사후에 붙여진 묘사의 명칭이다.


유교식은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법명과 법호가 붙여진다. 불교의 법명은 유교식과 달리 출가와 동시에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본인의 이름까지도 버리게 되기에 원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외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아호(雅號)는 호라고 하기보다는 필명 또는 닉네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일단 이 글은 유교식 호의 사용에 대한 개인적 거부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인의 명함에 기입된 이름 앞의 호는 아마도 유교식의 호의 범주에 포함되기에 본명(本名) 및 자(字)와 함께 조선시대 양반들이 주로 사용하던 호칭으로 저의에는 양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 경우이거나. 명함에 호를 붙인 사람들은 아마도 이름 대신 호를 불러 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본인은 유교문화를 신봉하니 유교식으로 자신을 대해 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본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명함을 받는 상대가 나처럼 유교적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민감함을 가진 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본인이 원하는 유교식 대접이 공자의 유학인지, 주희의 주자학인지, 조선의 성리학인지. 이들은 모두 같은 듯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뿌리가 같다고 잎과 열매가 반드시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접을 붙이거나 더부살이에 의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호를 만들고 명함에 박은 근거가 진짜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거가 유학이라면 공자만큼의 일가를 이룰 만한 학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며, 주자학이라면 도덕과 윤리 의식이 타의 모범이 될 만큼 철저해야 할 것이며, 성리학이라면 상하 관계의 질서와 예의범절이 DNA 속까지 완벽하게 새겨져 있어야 할 것이다.

접근성으로 봐서는 아마도 마지막의 성리학에 근거를 두기가 가장 편할 것이다. 대부분의 호를 가진 사람은 조선의 성리학에 기반한 한국식 유교를 생각하고 지었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도 회사에서는 꼰대, 가정에서는 가부장, 사회에서는 나이 한 살 차이에 멱살을 잡는 사람들 일수도 있다.

일단 본인의 성향과 특성을 떠나 현대 사회에서 유교식 호의 사용이 타당한가에 대한 고민이 사회적으로 한 번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안 좋은 전통이 아니라 좋은 전통일 때 말이다. 조선식 유교문화가 철저하게 뿌리내렸던 조선은 왕에 의해 통치되던 왕권국가이자 귀족국가였으며, 명분을 최우선하는 사대부의 나라였으며, 종법 질서가 무엇보다 중시되던 계급 사회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고귀했던 이름난 위인들조차 반인륜적인 반상의 구분을 극복할 수 없었던 그런 양반 중심 사회였다. 결코 좋은 전통만 있었던 사회는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권해드린다. 호를 붙인 이유가 '나는 양반이니 조선식 예를 갖추어 달라'는 의미는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명함을 주실 때 미리 말씀해 주시라, 그러면 그에 맞는 예를 갖추어 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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