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깨진 안경알 너머 세상 04
BC5세기경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에 묵자라는 선현이 있었다. 제자백가 중, 공자가 유가의 개조라면, 묵자는 묵가의 개조이다. 유가가 천관(天觀)과 인(仁)을 중시한 경천(敬天)과 애인(愛仁)을 말하였다면, 묵가는 겸애(兼愛)를 말하였다. 경천애인이란 하늘을 공경하는 천관과 인(仁은 人을 의미한다)을 사랑하는 애인(愛人)의 의미이다. 그러나 겸애는 유가의 사랑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평등한 사랑을 의미한다. 묵자는 유가의 애인을 유교적 종법질서로서 상하의 질서가 강조되는 편애(偏愛)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편하기 위해서는 위아래의 질서 구분이 없는 평등한 사랑인 겸애를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묵자서의 겸애 편을 보면 당시 묵자가 세상이 혼란한 이유에 대해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무려 2천5백 년 전에 이야기한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오늘날의 세상살이에 더 유용하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볼 때, 그의 사상과 식견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아니 굳이 그의 뛰어난 사상과 식견에 대한 칭찬은 차치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2천 년을 넘도록 그의 사상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였다거나, 아니면 정치적 또는 사회적(유교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왔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인간들의 간사함과 무지함에 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유가의 종법질서가 회의를 주고 있는 현대적 시점에서 묵자의 겸애사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 묵자의 겸애에 대한 단편을 들여다보자. 묵자는 다음과 같이 세상이 혼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하였다.
‘지금의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대국(大國)으로서 소국을 공격하는 일, 대가(大家)로서 소가를 어지럽히는 일, 강자가 약자를 협박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행하고, 사기꾼이 어리석은 자를 속이며,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일, 이것이 천하의 해악이다. 또한 군주로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 일, 신하로서 충성하지 않는 일, 아비로서 자비롭지 못한 일, 자식으로서 효도하지 않는 일, 이 또한 천하의 해악이다. 또한 지금의 천한 무리들이 무기와 독약을 가지고 서로 위해를 가하는 일, 이 또한 천하의 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천하의 모든 혼란은 서로 겸애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부조리이다.’-『묵자』서, 「겸애」 하편
이 말이 무엇인가? 바로 오늘날의 우리 세상의 혼란함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묵자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세상에 대해 비판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중원의 혼란이 지금은 글로벌 혼돈으로 범위가 조금 확대되어 바뀌었을 뿐이다. 현대도 뿔뿔이 흩어진 수많은 군소의 국가들이 각자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타국을 견제하고, 유린하고, 침략을 일삼고 있다. 시간만 다를 뿐 춘추전국 시대의 상황이랑 다를 것이 없다. 묵자는 이러한 혼란을 막을 방법을 이야기한 것이다. 따라서 묵자가 비판한 혼란한 세상은 지금과 다를 바가 없으며, 혼란한 세상을 막기 위해 이야기한 해결책 또한 현재에서도 유용하리라. 묵자는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다음과 같은 겸애의 실천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선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일삼는 자다. 반드시 혼란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와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 혼란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살펴보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 만일 천하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여, 남을 자기 몸 사랑하듯이 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겠으며 … 남의 집을 자기 집 보듯이 한다면 어찌 도둑이 있겠으며 …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한다면 누가 공격하겠는가.’ - 『묵자』서, 「겸애」 상편
이러한 그의 겸애사상은 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크게 세간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왜일까? 이렇게 큰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당시에는 왜 무시당한 것일까? 유교적 사상이 중심사상으로 확립된 사회에서는 당연히 유비(儒非)적 견해는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이 되는 것이 당연할 진대, 나는 묵자의 사상이 2천 년이 넘도록 배척된 이유를 그의 사상은 그가 살던 시기가 아니라, 즉 자기 시대의 세상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2천5백 년 후, 지금의 현실을 미리 예언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불안정한 현대는 공자와 맹자의 유교적 질서와 도의 이야기 보다 인본을 중시한 순자와 낮은 곳에서 만민평등을 주장한 묵자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겸애'는 우리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평등한 사랑'이다. 가끔 겸애를 ‘무차별적 박애’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겸애사상이 과거 유가의 유교질서에 배척당하였듯이 현대의 경제논리에도 배척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해석이 될 수 있다. ‘박애’는 국가, 문화, 경제를 초월하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지금의 노동운동들이 자본에 의해 유린당하듯이 평민계급을 위한 투쟁의 실천의지에 뿌리를 둔 겸애사상이 자본이라는 막강한 힘을 업은 경제논리를 극복하기는 더 힘들 것이다. 겸애는 초월적 사랑보다는 낮은 곳에서의 상생의 인간애 실천, 사랑의 보편적 실천으로 이해하여야지만, 서로가 서로를 한번 더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은 내 것만 보고 나와 다른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와 달라도 항상 보고 있으면 사랑은 저절로 실천될 수밖에 없다. 겸애는 큰 사랑도 높은 사랑도 아니다. 그냥 지긋한 사랑일 뿐이다. 이제 겸애를 배우고, 겸애를 실천하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가끔 고전 속에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선현들의 사상과 지혜를 접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바로 옛 선현과 현재의 내가 역사의 간격을 극복하고 사고의 공유를 통해 발전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면 인류의 발전은 역사를 기반으로 어제와 오늘의 소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전 속에서 현재의 문제가 예시되고, 고전을 통해 미래를 위한 해법이 주어진다. 고전을 버리면 미래를 버리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