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각과 약속)시간 2

일상 : 깨진 안경알 너머 세상 03

by 정로각심

시각과 시간은 다르다. 시각은 특정 시점을, 시간은 특정 시점과 시점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 각(刻)은 새기다, 깎다 등의 의미로 고정된 의미이며, 간(間)은 사이, 간극 등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약속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시각이 아닌 시간을 붙였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시각부터 그 사람과 만나 용무를 다 마치고 헤어지는 시각까지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약속시각은 그 약속이 시작되는 시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약속시각과 약속시간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대부분 약속의 만나는 시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늦지 않으려고 애를 쓸 뿐, 끝나는 시각은 빠르면 빠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대충 마무리하고 끝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오늘의 약속은 약속의 시작 시각에 늦지 않았으니 완벽했다고. 끝나는 시각은 의미가 없다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은 시간이 아닌 시각, 그것도 시작시각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약속의 시작시각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우리가 해 왔던 수많은 약속은 약속시각과 약속시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기에 약속시각과 약속시간을 약속시간으로 퉁쳐놓고 만남의 시각이 몇 시 몇 분 정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몇 시부터 몇 시 사이 또는 몇 분에서 몇 분 사이로 대충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또 암묵적이거나 민족별로 정해진 몇 시에 약속이라는 것은 그 시각 앞뒤로 몇십 분 정도의 범위가 약속시각으로 굳혀진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약속시각 앞 몇십 분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미리 갈 것을 예상하고도 약속시각을 늦게 잡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혹시 여타의 이유로 늦을 수 있으니 몇 시에서 몇십 분 늦은 시각 사이에 간다는 암묵적 약속이 잡히는 셈이다. 아마 코리안타임이 생긴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약속시각과 약속시간은 하나로 퉁쳐서 생각할 게 아니다. 구분해야 한다. 약속시각이 만남이 시작되는 시각과 끝나는 시각을 의미한다면, 약속시간은 특정시점이 아닌 약속의 시작 시각부터 종료 시각, 그리고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즉 오전 10시에 만나서 오전 12시에 끝나는 약속이라면 약속시각은 오전 10시, 약속시간은 10시에서 12시까지 두 시간인 것이다. 약속시간을 정한다는 것은 만나는 시각만 정확하게 지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과 과정 그리고 약속이 끝나는 시각 모두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약속을 잡을 때, 약속시간의 시작인 만남의 시각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만남의 과정과 끝나는 시각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우리에게 약속시간은 만나는 시각으로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자'는 말, 여기에는 '약속시각에 늦지 말자'는 의미만 내포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 쓸 바에는 약속시간이 아닌 약속시각이라 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약속시간은 약속이 끝날 때까지의 정성과 노력이 투입된다. 내 약속은 다르다.


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 업무적인 만남이 아니라면, 행복한 기대를 품은 만남이라면 다른 2차 일정은 잡지 않는다. 약속시각(만나는 시각)은 칼같이 지키되, 끝나는 시각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특히 오랜만에 만나는 만남이거나, 답답했던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마음 맞는 사람과의 약속은 특히 더 그렇다. 편한 사람과의 만남은 약속시간의 끝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여유로운 만남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업무적 약속이 아닌 약속은 2차 일정을 잡지 않는다. 이러한 약속은 좋은 만남과 좋은 시간이라면 예정에 없던 만남의 시간이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속을 잡는다는 것과 그 약속에 기대하는 바는 즐거움과 행복함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약속은 처음부터 잡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만났다면 그날 하루는 그 사람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업무적 약속이 아닌 사람과의 약속에서 약속을 했다면, 가능한 그날은 그 사람에게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 하루를 온전하게 바칠 생각이었어. 그런데 당신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후루룩 급하게 마신 후 다른 약속이 있다고 가버렸어. 그렇게 내 나머지 하루는 엉망이 되어 버렸지. 앞으로는 그런 약속은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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