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1(이라는 게 참...)

일상 : 깨진 안경알 너머 세상 02

by 정로각심

송구영신 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1월의 반이 흘렀다. 시간은 광음여시(光陰如矢), 세월유수(歲月流水), 토주오비(兎走烏飛)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 화살이 날아오르고, 홍수가 몰아치고, 까마귀가 떼로 날아올라 잠시 한눈 판 사이 보내 버린 보름의 시간이 아까워 요동치고 있다. 벌써 일 년의 1/24이 지났다. 여차하면 1/12이 간다. 아차하면 1/6이다. 후회하면 1/3이 가고 돌아보면 연말이다. 또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이어 하겠지.


시간이란 게 참 그렇다. 세상 편리하게 살려고 물리적 기준시간을 만들어 놨지만, 시간은 절대기준이 없다. 우주시간도, 지구시간도, 사람시간도. 다 다르게 간다. 물리적 시간은 사회생활이나 수학에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될 뿐, 사람의 시간은 단 하나도 같은 게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1년 365일은 세상의 시간이고, 1년 번갯불에 구워진 콩은 내 시간이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의 시간은 다 다르다고,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의 심리적 길이에는 공식이 있다고.


(365÷자신의 나이)+알파=일 년의 심리적 길이, 그래서인지 요즘은 일 년이 일주일 같다.


시간의 속성은 마치 양자역학의 성질과 비슷하다. 관찰하면 천천히 가고 관찰하지 않으면 빠르게 간다. 시간을 길게 쓰려면 항상 관찰을 하고 있어야 하고 시간을 빠르게 쓰려면 무시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후설이 이야기했다 시간은 인간의 내재적 현상이라고.


그건 그렇고 빠르다 느리다는 속도의 개념인데 아무래도 시간은 속도가 아닌 것 같다. 시간은 팽창하는 부피가 맞는 것 같다. 왜냐면 태초의 시공간이 빅뱅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같이 팽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타당한 물리학 이론이다. 따라서 팽창하는 우주에서는 인간의 지각능력을 벗어난 아주 순간이지만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경계가 있다. 부피의 경계이다. 그 팽창되는 공간의 크기를 물리학은 계산하기 편하게 시간에 물리적 속도를 부여하고 t라 불렀다. 거기에 방향을 더해 +t라 하였다. 그래서 속도의 방향은 외부의 무한을 향하게 되고 덕분에 팽창의 뱡향은 내부의 구심점을 향한다.


세상이, 우주가 한계가 있다면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지만, 한계가 없다고 한다면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누적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팽창하는 시간의 방향이 내부를 향한다면 시간이 팽창한 크기만큼 누적된 양이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한계가 있으니 내가 59년을 살았으니 내 인생은 외부로의 방향인 2,30년 남았다가 아니라. 내부로 축적되어 내 인생의 시간이 59년 치 누적되었다가 맞다. 내 역사가 세상의 역사에 59년 치 아니면 59페이지 정도 추가된 것이다.


시간이 간다는 속도의 느낌은 내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어 언젠가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고, 시간이 팽창한다는 것은 내 삶의 시간이 그 부피만큼 누적되어 내 흔적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은 사람은 속도를 가진 시간 속에 살면 되고 세상에 나를 남기고 싶은 사람은 팽창하는 시간 속에서 살면 된다. 내가 남길 흔적을 고민하면서... 이것이 글을 쓰게 하는 창작의 동력이자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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