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깨진 안경알 너머 세상 16
언제부터인가 애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사적인 자리에서도, 식당에서도 길거리에서도, TV에서도 영화에서도, 심지어 집에서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용어가 되어 버린 단어 중의 하나가 '존나'이다. 너무 자연스러워 이제 듣는 나도 대화를 매끄럽고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유용한 부사로 인식하는지 별로 거부감 없이 듣고 흘러 넘긴다. 그렇다고 입에 달고 살지는 않는다. 나 스스로는 가능한 사용을 피하고 있다. 그 단어의 어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애용하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그 어원과 기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지, 알고도 이렇게 애용을 할까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이 단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던 걸로 안다. 하지만 안 찾아봤다. 궁금하면 찾아봤을 테니 대부분 그 어원에 대해서는 알 것이다. 나도 그냥 궁금해진 김에 어원보다도 기원에 중점을 두고 내 생각대로 한번 풀어볼까 한다. 풀어보다 보면 뭔가 교훈적 결론으로 유도될지도 모르겠다. 일단 한번 가보자.
포털사이트 어학사전을 검색해 보면 '존나'는 경상도 사투리로써 '좋으냐?'의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서는 아예 검색이 안 된다. 다만 예문들이 뜬다. 첫 예문이 "나는 씨발 존나 젊다."이다. 욕이다. 일단 욕과 함께 쓰인다. 이 단어가 들어간 문장들은 대부분은 욕지거리이다. 그렇다면 이 '존나'라는 단어도 욕일 확률이 높다. 욕을 일상에서 입에 막 달고 다닌다 말이지? 이 욕에 대한 기원을 밝혀 본다.
나는 지금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 단어의 기원을 밝혀주고자 한다. 때는 1985년 대구의 ○○남자고등학교 체육시간, 아니 체력장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특별시간이라 해야 하겠다. 뭐 이때는 시도 때도 없이 체력장을 위한 훈련을 해대었으니까. 요즘은 체력장이 대학입시에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체력장이 총점에서 20점이나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교과시험이었다. 그 역할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아주 교조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체력장은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대입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모의고사, 학력고사, 논술시험 그리고 면접이라는 험난한 장거리코스를 견뎌내기 위한, 거기다 입학했을 때 신입생환영회라는 엄청난 육체적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첫 관문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아주 배려 깊은 교육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체력장이 없어진 요즘 학생들이 안돼 보인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당시 체력장 시험 종목은 100m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멀리 던지기, 멀리뛰기, 턱걸이, 그리고 1000m 오래 달리기가 있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100m 달리기였으며, 남학생들은 100m, 여학생들은 70m였던 걸로 기억된다. 내 기억으로는 이 100m 달리기 종목은 남학생들의 생존이 걸린 종목이었다. 왜냐하면 화장실 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학과선생님이 오면 얼굴을 들키기 전에 총알같이 도망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이 시대를 지내온 남자면 다 알 것이다.
100m 달리기의 경우 만점이 18초이었던가 그렇다. 사실 어느 정도 건강한 남학생이라면 대부분 만점을 맞는다. 하지만 공부에 절어 있던 불쌍한 청춘들 중에는 달리기가 쥐약인 친구들이 반드시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한점 싸움이 당락을 좌우한다고 서로 경쟁을 하겠지만 그땐 달랐다. 의리가 있었다. 그들 또한 친구였고 모의고사 때는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의 아니 성적의 원천이었으니,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은 바로 이 말이었다. "○○야 좆빠지게 뛰어!" 그러면 옆이 있던 체육선생님 왈, "이놈들아 남자가 좆이 빠지면 어따 써먹냐!" 그러면 우리는 또 응원을 한다. "좆 빠진 ㅇㅇ야! 이번엔 좆나게 뛰어!" 이것이 '좆나게'를 어원으로 하는 '존나'의 발생 기원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학술적 근거가 있다면 이의를 제기해도 된다. 양보할 의사가 있다.
'좆'이란 남자의 성기를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지만 사전에서는 '자지'로 표기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은 같아도 사전상의 정의 때문에 비어 아닌 비어, 속어 아닌 속어, 비속어로 전락해 버린 단어이다. 그래서 결국 좀 노는 남학생들이 사용하는 은어로 전락하였다. 그러다 보니 같이 놀던 깻잎머리 여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좆나게'를 즐겨 말하게 되고, 또 그 어감이 좋았는지 아예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좆나게'는 고등학교 때의 추억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내가 전역을 하고 복학할 무렵이 되자 대학가에선 고등학생들도 없는데, 여기저기서 '좆나게'라는 귀에 익은 단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갑자기 대학가에서 '좆나게'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유는 시기적으로 대학수의 증가와 학생수의 감소로 인해 대학입시가 어느 정도 느슨해지면서 과거 '좆나게'를 연방 외쳐대며 뒷골목에서 좀 놀던 학생들이 대학에 쉽게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좆나게'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문화 트렌드가 되어 버렸고, 이를 말하지 않는 자들은 왕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 때쯤, 인터넷의 보급에 의한 채팅 문화의 확산은 돌풍처럼 전국적으로 '좆나게'를 외치게 하였고, 우리의 젊은 청춘들은 보다 빨리, 보다 많은 채팅 기회를 선점을 위해 '좆나게'를 결국 '좆나'로 축약시키기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좆나'도 얼마 되지 않아 '좆나', '좇나', '좃나'의 지루한 맞춤법 싸움 속에서 극적 합의점을 통해 '졸라'로 변형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와중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귀차니즘의 극에 달한 누군가가 극한으로 축약된 사람의 모습을 한 영웅을 캐릭터로 그려내었고, 그 이름을 '졸라맨'이라고 붙였다.
이 졸라맨의 등장이 문제였다. 졸라맨은 은어를 당당하기 자신의 이름으로 달고서 오픈된 인터넷상에 등장하여 학생들의 우상이 되어 버렸다. 아마 졸라맨의 작자는 졸라의 어원적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을 추측은 되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인터넷은 검증되지 않은 지식들이 판을 치던 시기였지만 정보의 바다답게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분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대의 졸라맨이 거의 무한의 역동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GIF파일로 제작되어 영웅의 자리에 오르면서 '좆나게'는 그 역할을 다하고 '졸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졸라'는 그때부터 좀 놀던 안 놀던, 좀 배웠던 못 배웠던, 애고 어른이고, 심지어 학교의 선생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너무나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 버린다.
욕인 줄 알고도 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자연스러운 용어가 돼 버린 것이다. '졸라'는 아직 그 용어의 변형이 아직 한 단계의 변화과정 밖에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욕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는 이러한 좋은 아이템을 절대 그냥 썩히지 않는다. 당장에 소설이든, TV드라마든, 영화에서든, 최대한 욕처럼 들리지는 않지만, 그 어원이 욕이므로 욕이 가진 강렬한 임팩트를 발생시킬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의미는 같지만 표기가 크게 다른 2차 변형 단어인 '존나'였다.
그리하여 '존나'는 대중문화라는 엄청난 파워를 등에 업고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존나'에 존나 익숙해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를 경험 삼아 다른 단어의 무분별한 변형과 변용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과연 이러한 상황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정상적인 변화로 이해 가능한가?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였던 소쉬르가 지금 여기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에~, 언어(말과 글)란 것은 기표와 기의가 있으며 하나의 기표에는 충분히 다른 기의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굳이 잘못된 사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또 해체주의 철학자인 데리다도 지금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분명할 것이다. "에~, 하나의 단어는 그 의미가 시간의 지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차연(Differance)'이라는 전문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과거의 '좆'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현재에 와서 그 기표는 물론 기의도 변화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해체주의적으로 보면 전혀 이상이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용되고 있는 '존나'를 너무 색안경 끼고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감탄사요. 유도사요. 강조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어학과 기호학에서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두 학자의 이론을 근거로 한 가상적 정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논변일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이 변하듯 언어 또한 변한다. 그렇게 기표와 기의가 변형되거나 변용되는 단어들이 어디 '존나' 뿐이겠는가.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단어들이 어원적 의미는 상실한 채, 현대에 이르러 의미는 무시되고 전혀 다른 상황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니미' = '원래 너네 엄마를 뜻하는 욕인 니기미(너거 어미)가 변형', '시바' = '십할'(18, 십할은 '십하다' 성교의 비어로 예전엔 허락된 성교와 집창촌에서의 불법적 성교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였던 것 같다.) 더 있을 것 같은 당장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과거 2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은, 즉 조선시대의 '이 호로자식아'에 버금가는 욕은 '니기미 십할 조또~'였다. 이 말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너네 엄마 창○지? 창○촌에서 ○이나 ○는~' 이 말을 듣고 폭발하지 않는 사람은 당시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술집에서 자주 발생하는 취객들의 싸움도 웬만한 욕에서는 참고 있다가 당시 조직에서조차 불문의 금기어인 이 한마디를 술김에 잘못 내뱉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근거 없는 통계도 있다.
과거 욕으로 사용되었던 수많은 용어들이 지금은 기표는 물론 기의도 변형되어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중 있는 단어가 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인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언어는 욕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다는 새로운 학설이 나타날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욕은 욕이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이고, 욕은 웃으면서 아무리 곱게 써도 욕일 뿐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현대 언어의 이중적 또는 상황적 의미변화에 대한 중요성과 과오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언어의 사용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특히, 국정이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지금 모두가 언어의 사용과 이해에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국가는 '국민'을 외치면서 '봉'으로 이해하지 말 것이며, 국민은 '국가'를 부르면서 '적'으로 대하지 말 것이며,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을 '권력이나 힘'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기업의 사장은 '근로자'를 '일하는 기계'로, 근로자는 '기업'을 '밥줄'로 오독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옛날 선조들이 '똥'을 '된장'이라 잘못 불렀던 오류를 핑계로 '자유'를 '방종'으로 이해하고, '분열'로 가는 길을 '통일'로 가는 길로 오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오해하고, '과거'는 '죄악'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다 보니 어느 순간 '진보'라는 인류사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단어는 '빨갱이'로 인식되어 버린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소쉬르와 데리다를 땅속에서 깨워 이론을 다시 정립하라고 해야 하나? 지금쯤 우리의 혼잡한 정치와 이념을 정리해 줄 영향력 있는 언어학자와 사회학자가 몇몇이 나와야 하는데 다들 뭐 하시나? 국내에는 없는 것인가? 좀 더 기다려 볼 테니 빨리 좀 나오셔!~.
"아~ 긴 글 적었더니만 '존나' 피곤하네..."
(브런치 글쓰기 맞춤법 은 '존나'를 '굉장히'로 순화시킨다. 이 보다 자주 사용되는 대체 용어는 '겁나'이다. 이는 '겁나게'의 준말로 의미는 '무서울 만큼'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