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탄의 귀환
내일 아침 8시 20분까지 도착하면 역 삼진어묵에서 어묵을 사주겠다고 일찍 오라고 했던 종철이의 말을 기억하며, 나는 겨우 시간이 다 되어 용산역에 도착했다. 벌써 친구 세명은 어묵을 한 개씩 먹고 서서 한 손에는 꼬치를 꽂았던 종이컵을 들고 있다. 종철이가 사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수오가 특별히 산다고 나에게 카드를 건네준다.
어묵집 안으로 들어가 메뉴를 살펴보고 어묵 하나를 주문하였다. 아침밥 안 먹고 온 터라 김이 나는 국물 냄새와 어묵꼬치를 보니 군침이 돈다. 뜨거운 어묵 국물은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꼬치에 꽂힌 어묵은 조금씩 입으로 베어 물면 짭조름하고 쫀득한 맛이 난다.
오늘 타고 가는 홍성행 열차는 지난번 열차보다 4천7백 원이 더 비싼 Itx-마음 열차로, 용산역을 8시 56분에 출발한다. 작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찍 20분 전부터 탑승구에 서서 대기하며 승차 홈 번호가 핸드폰에 뜨기를 기다렸다. 7번 홈을 확인하고 우리 친구 네 명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서 기차에 올랐다.
집에서 수원 쪽이 더 가까운 한수는 수원역에서 우리가 타고 가는 열차에 합류하겠다고 어젯밤 나에게 몇 번이나 확인해 주었다. 잠시 후 열차는 용산역을 출발하여 영등포를 지나 수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약 30분 정도 지났을까, 핸드폰에 "긴급 상황 발생, 열차시간을 놓칠 수도 있음" 이라는 다급한 한수의 문자가 왔다. 연착이 없는 지도 묻고 있었다. 문뜩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혹시 늦어 우리가 타고 가는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다면 바로 뒤에 오는 열차를 타고 올수 있도록 알아 보았다. 다행히 우리 뒤 20분 후에 수원역을 지나는 열차가 있었다.
그 시간을 카톡으로 급히 알려주고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 다급한 음성과 뛰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기차는 수원역에 정시에 도착하였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면서 다음 역을 향해 출발 준비를 한다. 그때까지 한수는 아무런 전화나 연락이 없다. 열차 문이 닫히고 큰 경적을 울리며 기차는 떠날 준비를 한다. 나는 혹시 우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 올 한수 모습을 기대했지만 한수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한수 성, 왜 이래?
길눈이 밝고 정보 찾는데 누구보다도 빠른 사람이 이제 이런 실수도 하네!
집을 출발하여 수원역으로 오는 길에 차가 막혀 얼마나 마음 졸이며 고생했을까? 그리고 기다리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과 정신없이 뛰었을 친구를 생각하니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의 출발은 첫 번째 실수의 시작이다.
재작년 겨울여행 때 굴집에서 생긴 가보세 굴 수산집 매력에 홀린 그분의 러브스토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친구들 마음속에 항상 기억되고 있었다. 그동안 그분의 사진을 스케치로 그렸고, 빨리 작품이 나오기를 친구들은 계속 재촉하고, 한수는 완성된 그 작품을 은밀한 곳에 두고 보관하며 마음 졸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스케치를 들고 주인공을 찾아 전달하러 이곳 천북항 굴 단지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친구 모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2월이 지나면서 굴맛은 떨어지고 단지 진입로로 가는 길은 벌써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굴을 잔뜩 싣고 오는 배는 천북항의 잔잔한 파도와 밀려오는 바람 소리에 아름다운 겨울 바다의 풍경화가 되었다.
지난번 먹은 대로 메뉴는 변동 없이 굴찜, 구이 반반으로 시켰다. 주위를 돌아보고 서빙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며 오늘 이 스케치를 받을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을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드디어 핸드폰에 보관 중인 나, 한수 그리고 그분 셋이 함께 찍은 인증사진 한 장을 깊은 곳에서 찾아 그분을 가리키며 굴집 여 주인에게 보인다.
"이분이 어디에 있어요?" 라고 물어본다. "아! 그 사람, 지금은 여기에 없고 여기서 조금 가면 무슨 대학이 있는데 거기 교무처에 근무해요"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분의 행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들고 간 스케치는 주인공을 잃은 채 다시 한수의 손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이 분을 찾아, 누가, 언제 전달해야 할지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왜 우리가 고민하며 발생할 위험을 안아야 하는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까짓 상대방의 성의를 무시할까? "당신은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입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겠지? 라고 한수는 오늘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홍성에는 문. 무를 겸비한 위인들이 많이 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의 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과 업적을 보았고, 바로 앞 작은 연못에서는 여름에 활짝 핀 연꽃이 추운 겨울에 앙상하게 긴 줄기만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기념관에서는 전시한 많은 서예 작품들, 생가 곳곳에 걸려있는 싯 구절, 능 앞 넓은 푸른 잔디 광장에 기개있게 서 있는 소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청산리 전투 영웅 김좌진 기념관을 방문했다. 만주 간도 지역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 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큰 승리를 거둔 용감한 장군 김좌진, 그 기념관은 넓은 뜰에 생가와, 잔디마당이 잘 조성되어 편안하게 구경했다. 군인들을 이끌고 지휘하며 왜적을 무찌른 그 기상과 기개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일 듯 한다.
굴집에서 과식한 덕에 배는 아직도 부글거리며 속은 좋지 않다. 다른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아 조금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수오는 특히 속이 좋지 않은지 배를 계속 만지며 이른 저녁을 먹기에 부담스럽다는 눈치다. 소화제를 살 곳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우리가 저녁 먹으러 가는 그 음식점 옆에 다이소가 있다고 했다. 점심에 굴찜을 푸짐하게 먹은 덕에 걸으면서라도 소화를 시켜야 했지만 돌아갈 기차 시간을 감안하면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어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최근에 문을 연 홍성군청 근처 샤브연리지에 우리 차는 도착하였고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수오가 위생천 한 박스를 사서 들고 급히 우리 뒤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 왔다. 식당은 주말을 맞아 가족단위로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며 사람 수에 맞춰 자리를 잡고 앉는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플라이투더스카이 브라이언 가수와 똑같이 생긴 짧은 머리에 귀에는 이어피스를 꽂고 카운터에 서서 우리를 맞이하는 사장이 반갑게 인사하며 바로 좌측 벽 쪽 넓은 자리에 손짓으로 우리 자리를 안내한다. 준비한 소고기 샤브샤브는 인덕션 위에 폿트가 올려지고 그 안에 기본적인 육수를 넣어 끓이며 소고기를 조금씩 넣고 야채와 함께 먹는 음식이다. 낮에 먹었던 굴찜의 찝찝한 맛을 뜨겁고 얼큰한 국물이 바로 잡아주며 시원하기까지 하였다.
샐러드바에서 다른 반찬을 추가로 가져다 먹으며 소고기를 폿트에서 건져 맛있게 먹고 있다. 그런데 어느새 각자 자리 식탁 위에는 수오가 가져다 놓은 위생천 한병씩이 놓여 있었다. 어떤 친구는 한 병을 마시고, 또 따지 않은 한 병이 더 올려져 있다. 나는 정신없이 먹다 보니 주위를 의식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카운터에 서 있는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 식탁에 올려진 위생천 병을 보고 크게 놀란 모습이다.
사장의 얼굴은 화가 뭉크의 절규와 같이 이그러진 모습이고 , 이 식당을 개업한 이래 아무리 많이 먹는 사람이 와도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이놈들은 대체 음식을 얼마나 더 먹으려고 아예 위생천 소화제까지 턱하니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기 시작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며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또 다른 테이블의 서빙을 위해 홀안을 왔다 갔다 한다.
나 또한 사장의 표정에 더 놀라며 웃음이 터진다. 우리네 미덕이라면 최소한 위생천을 감추고 먹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아예 대놓고 먹는다는 것은 음식점 사장에게 염장을 지르고 고추가루를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홍성 바닥에 센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토성의 위성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큰 천체를 가진 타이탄보다 더한 녀석들이 출현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점점 기억도 희미해지고, 청력도 떨어진다. 옆에서 말을 해도 잘 안 들린다. 보는 것도 안경을 위아래로 조절해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건망증은 생기고, 건성증도 생긴다.
샤브집에서 사장의 놀란 모습을 보며 맛있게 저녁을 먹고 이제 홍성역으로 가기 위해 차에 탑승했다. 경식이가 챙겨준 냉이나물 봉지를 하나씩 잘 챙겨 10분 정도 차 안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 보니 차는 벌써 홍성역에 도착했다.
하늘은 다 찬 보름달이 둥글게 떠서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밝히고 있다.
가방을 들고, 냉이 봉지를 들고,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려 곧바로 홍성역 안으로 들어간다. 경식이와 오늘 하루 같이 보낸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계단을 내려와 플렛폼으로 들어왔다. 플랫폼 대기 부스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씩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종철이가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얼굴 표정이 굳어진다. 재킷과 바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내 핸드폰이 없네, 차에 놓고 온 것 같은데?"
이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대화가 끊기고 종철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순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지금 기차 올 시간이 채 6분도 안 남았는데..
수오는 빠르게 우리를 배웅하고 집으로 한참 가고 있을 경식이한테 전화를 걸며 차 뒷좌석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는지를 봐달라고 한다. 다행히 차 안에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홍성역으로 뒤돌아 오라고도 한다.
종철이는 그 순간 대기 부스를 벗어나 벌써 홍성역 앞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는 과연 홍성역 7시50분 출발 시간까지 종철이가 핸드폰을 찾아 돌아올 것인지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7시49분에 기차는 홍성역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며 서울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탑승한다. 우리는 종철이가 오기를 기다리며 일부러 제일 마지막으로 기차에 오르며 계속 뒤를 돌아 보았다. 우리도 모두 탑승하고. 기차 안의 좌석에 앉아서 우리에게 뛰어 들어올 것만 같은 종철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수오는 방금 경식이한테 종철이가 역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재빨리 기차 탑승구 쪽으로 내려가 이제 막 출발신호를 하려고 준비 중인 역무원에게 "잠깐만요, 저기 지금 계단에 친구 한 명이 올라오고 있어요, 출발하면 안됩니다" 라고 하자 "안됩니다" 라는 말을 한다.
그 순간 무섭게 정신없이 온 힘을 다해 뛰어오는 종철이가 보인다. 나는 손을 내밀어 종철이의 오른손을 힘껏 잡아당겨 기차 안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그 후 기차는 7시50분에 큰 경적을 울리며 홍성역을 출발하였다. 모두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은 아무말이 없었다. 간발의 추억 이었다
오늘 출발부터 한수성이 첫 실수를 하고, 마무리는 종철이가 두 번째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올해 첫번째 홍성여행은 많은 사연을 남겼다.
건망증이 아닌 건성증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종철 성,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