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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Aug 19. 2024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길이 주먹질하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온몸에 가해지는 길의 폭력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출근길에,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나눠 마실 커피를 사서 내딛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발목을 접질렸다. 정형외과에 가서 X-레이를 찍고 보니 발목인대 파열이라고 했다. 다행히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어서 부기가 가라앉으면 통깁스하자며 반깁스하고 약을 처방을 했다. 심하게 붓고 발목에서 발가락까지 전체가 멍투성이여서 물리치료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붓기와 멍이 여전히 너무 심하다고 발을 쓰지 않도록 하고 발을 올려서 생활하고 냉찜질을 자주 하라며 목발을 처방했다. 이런 상태로는 통깁스가 불가능하다고 영구 장애를 갖고 싶냐며 약을 더 처방해주며 의사는 기어이 쓴소리를 뱉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인대가 나간 왼쪽 발목을 덜 쓰기 위해서 보조로 사용하기 시작한 목발을 사용하면서 『송곳』의 대사,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그간 소수자 인권활동가라고 자신을 정의 내리며 살아왔고 특히나 직장뿐 아니라 관심 분야가 장애인 인권 쪽이었다 보니 무관심한 대다수 비장애인보다는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던 것 같다. 아, 이 얼마나 무지한 교만인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한나절 체험 따위를 통해 아는 것이, 활동 보조를 자처해 지원하며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하찮은 영역에 불과한 것인지를 통째로 알게 됐다. 길은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내내 그것을 몰랐다. 길이 가진 폭력성이라니! 가끔은 길을 걷는 게 낭만적이고 부드러워 행복하기도 했는데 저렇게 다른 얼굴로 성을 내고 있다니.


그다음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목발을 사용하고 얻게 된 온몸의 통증과 손바닥의 멍에 익숙해질 무렵, 간편하게 발목을 잡아주는 보족기를 사서 신고 목발을 짚어 병원에 가는 길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눈처럼 내리는 아름다웠다. 그간 집 근처에 그 길을 두고도 계단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길을 걷는 게 무섭도록 힘겨워서, 비장애인에게 상대적 박탈감마저 느끼며 임시 장애인인 나는 조금 서러웠다. 봄밤의 아름다움은 내 것일 수 없었고 그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침내 그 길을 걷게 되었을 때, 감상에 젖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불쌍하게 보기도 하고 불쾌하게 보기도 하며 지나치는 여러 사람이 나의 거동을 훑어댔다. 천천히 기뚱거리며 걷는 내게 보인 시선은 때론 어이없게도, 낯선 존재를 향한 두려움까지 엿보였다. 감히 그 몸으로 이 길을 왜 나와 걸으며 인파 속을 헤집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 하는 무언의 압박도 따랐다. 꽃길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데이이트로 들뜬 마음도 아니고 그저 병원 가기 위해 나선 길이었을 뿐인데도 무리와 차별되는 사람은 그저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본문 삽입 그림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작가 피델체



길지 않은 얼마 전, 서울 출근 시간대에 휠체어를 탄 무수한 장애인들이 전철을 탔다. 그걸 두고 누군가는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고 폭력적을 휘두른 거라고 했다. 그동안 이 장애인들은 어디에 있었겠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동안 비장애인이 누린 그 안락한 평온은 바로 그 수많은 장애인의 희생을 볼모 삼아 이룩된 평화가 아니었냐고. 자신의 자동차도 없는 빈곤한 장애인들이 출근길이 어땠겠냐고. 그 긴 시간을 저당 잡히는 매일 속에서, 무수한 비장애인들이 보였을 따가운 시선을 무방비로 견뎠을, 그 사람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겠느냐고. 왜 보이지 않았겠느냐고. 왜 그 긴 세월 비장애이인들은 불편하지 않았냐고. 왜 장애인들은 그토록 불편해서, 길이 폭력적이어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 무언의 시위를 하는데, 이 순간에서야 왜 불평하느냐고. 장애인들은 이 나라의 시민이 아니냐고.


이동의 자유와 꽃길의 낭만을 만끽하는 설렘과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시민의 권리가 왜 장애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느냐고. 우리는 그걸 물었어야 했다. 올해도 사월 이십일은 장애인의 날로 내세워 기념하지만 그 필요가 오히려 역설적이다. 소수자에게 덤벼드는 저 무수한 차별이 사라진다면 구태여 ‘OO의 날’이라 명명하여 기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아야 한다. 소수자의 삶은 자꾸 가시화 되어야 하고 그 가시화를 통해 낯섦도 불편도 민낯 그대로 보여서 구석구석 비춰야 한다. 그 가시화의 행진을 두고 왜 폭력이라 하는가. 이 사회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구체적으로 뻔뻔하게 차별적인가.


하여 장애인의 날이 아니다. 어딘가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곡기를 끊고 농성 했고 어디선가는 24시간 활동 보조를 위해 삭발을 감행했다. 무엇이 그들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목숨을 내어놓고 매달리게 하는가. 그러므로 다시,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 아니다.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다.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고 마침내 장애인을 기념하는 날이 사라지길 염원하는 날이다. 그런데도 오늘 달력은 여전히 장애인의 날이다. 차별적으로 모습을 달리하던 길처럼 막무가내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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