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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Aug 24. 2024

낭만에 대하여

고등학생 때였다. 뜀틀 시험을 앞두고 연습하는 모든 동작이 즐거웠다. 그러나 낙상하고 나서는 힘차게 발 굴러 뛰어가 뜀틀에서 멈췄다. 얼음이 된 채 다음 학생 순서를 위해 내려오면서도 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낙상의 트라우마가 계속된 실패를 만들어 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체육 선생님은 멈추는 나를 끈질기게 주목하고 지지해 줬다. 실기 시험 당일, 들려오던 A라는 외침.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착지자세는 분명히 불안했다. 선생님은 공포와 싸웠던 내 순간과 그것을 극복해 낸 순간을, 지켜내듯 직시했다. 그때 선생님이 말한 A라는 점수는 공포와 극복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처럼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잊지 못할 기억이 돼 버린 그날의 오후, 어쩌면 선생님도 잊어버린 기억일지 모르지만 내겐 각인처럼 박인 응원.


청소년들이 처절하게 고통받는 현장, 그것도 집단 죽음으로 몰리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끔찍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청소년들이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웃고 떠들며 오직 즐거운 시간만을 위해 각자가 준비한 소소한 이벤트는 분명 희극 속에 있었다. 다만 현장에서 풀어지기도 전에 막혀버리고 무너져 버리고 그 끝이 죽음까지 이어지는 모든 과정이 비극으로 끌고 갔다. 처참한 결말을 이룩해 낸 그 바닥을 본다. 그걸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어른들이다. 분명 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어른들의 문제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감상에 잠기고 고요히 있을 모든 상황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조직해 놓았다. 그 불안한 곳에 아이들이 몰릴 때도 손 놓고 있기만 했다. 아슬아슬한 현실에도 청소년들은 축제처럼 자유로운 기쁨을 만들어냈지만 그걸 재난으로 회전시켜 버린 건 어른들이 만든 모든 잘못들이다. 이후에나 얄팍한 안전 방침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는 척하는, 추하고 게으른 책임감으로 무장한, 우리 어른들의 구성해 낸 사회는 사실 지옥에 가깝다.


수능 때가 오면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무수하게 갈려 나가는 영혼들을 본다. 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않는 청소년들, 사회에서 관심조차 주지 않는 청소년들의 현장은 누군가의 죽음이 있을 때만 잠시 관심을 보인다. 보였다가 사라진다. 시험을 전후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청소년들의 고통도 역시 삭제된다. 입시 중인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그게 누구의 성공이든지, 죽어 나간 패배자는 잊혀야 한다. 그걸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일반의 반열에도 끼어들기 어렵다. 불순한 존재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떨어지고 상처받아 본 적 있는 자들은 성공을 향한 스피드를 늦추려고 한다. 위험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은 위험하다. 어른들은 성공을 직시하라고 알려줄 뿐이다. 사방으로 트인 주변이 아니라 멀리 있는 성공,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 역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모두가 오직 성공만을 바라볼 뿐이고 바라봐야만 한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를 이어 수능을 지켜보면서 올해도 철썩이며 밀려가고 밀려오는 아우성을 들었던 것 같다. 고통에 침식당하면서 글쓰기는 자꾸만 힘들어졌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편의점에 들렀다. 갑자기 폭우가 내렸다. 어느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캄캄한 하늘과 가로등 불빛 속에서 사선으로 빗줄기는 이어졌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잠시 바람이 멎었고 물방울들이 공중에서 부유했다. 낱낱으로 느리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중력의 빗방울들처럼 가만히 느리게, 쏟아지던 시간. 아름다운 장면은 느닷없이 다가온다. 그걸 음미하는 시간은 크게 길지 않다. 차가운 가을비에서 여태껏 감각하지 못했던 상태를 맞닥뜨리고 그걸 가슴에 새기며, 떠올린 단어, 낭만(浪漫). 이걸 잊고 살았구나. 낭만을 느끼고 감상할 잠깐조차 허용 않는 사회에서 다음 세대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아연해졌다.


체육 시간 트라우마를 극복한 기억은 내게 낭만이었다. 마찬가지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도 핼러윈 파티를 찾아 나서는 것도 모두 낭만이었을 터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그걸 건너뛰어 가는 것도 낭만일 수 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 부닥칠 힘겨움과 패배와 슬픔과 고통도 지나가면 모두 낭만일 수 있는 사회는 현재 우리에겐 너무나 멀리 있어서 마치 천국 같은 신기루처럼 보인다. 죽음으로써 혹은 죽어야지만 겨우 지탱되는 고달픈 작금의 상황에서 낭만은, 전투적인 성공가도 안전불감의 사회 안에서는 생존 때문에라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실패할 수 있다. 패배할 수 있다. 뛰어놀 수 있다. 그게 어디서든 안전이 보장받을 수 있어서 공포스럽지 않다. 무너지더라도 일어날 수 있게 지긋이 응시하는 눈길, 위험을 철저히 예방해 놓는 손길, 다양한 방향으로 길을 터주고 그 길이 나쁜 선택이었다는 후회를 줄여나가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이다. 기댈 언덕이 돼 주는 것은 온갖 세상 횡포로부터 막아내는 언덕이 되기도 하고 오르면 내려오고 더 높이 올라설 발판이 되기도 한다. 먼저 산 사람은 그만큼의 의무 안에서 아이들의 낭만과 맞물려 굴러간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에 낭만이 가득 차기를 바란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안전하게 껴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세대에게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는 탄탄한 현재를 바란다. 부디 단단하게 직시하며 끝까지 지켜내는 어른이 바로 내가, 바로 우리가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2023년 11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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