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사용 중인 무선이어폰과 스마트폰을 연계해 특정한 기능을 설정하면 ‘개인 맞춤형 공간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이 기능을 사용하기 전에는 몰랐던 게 아쉬울 만큼 내 머리를 따라 움직이며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면 마치 음악이 따라오는 듯 입체적 음감을 즐긴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사용할 만큼 섬세한 설정이나 뛰어난 음색을 구현해 내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휴대의 편리성에 중심이 있는 이 작은 세계가 이 정도의 능준한 퀄리티를 만들어주어서, 딱히 음악 감상에 있어 탁월한 감각은 없는 나로서는 꽤 만족스럽다. 더구나 타인의 소리나 원치 않는 음악을 강제로 들어야 하는 공간에서 노이즈캔슬링으로 오로지 내가 선택한, 내가 조절한,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음악을 감상하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척 기쁘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를 듣고 있다. 그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내 머리 방향을 따라 물결친다. 그가 바로 옆에서 연주해 주고 있는 착각이 드는 순간이 순간으로 이어진다. 평소 쪽매붙임 상자처럼 틈과 틈을 단단히 맞물린 듯한 연주와 그에 대비되는 여유로운 흥얼거림을 들으며 곡과 연주에 대한 우아함과 자신감, 압도적인 만족감을 종종 느꼈다. 음악에 대한 문외한이고 그가 무대 연주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외엔 아는 바가 거의 없기에 이건 단순히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오늘은 이 소리들이 가깝고 먼 거리를 사이에 둔 채 더 조화롭게 흘렀다.
기술의 발달은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누릴 수 없던 다양한 사건들을 누릴 수 있게 하고 향유하게 한다. 다양한 음향기기가 발명되면서 이미 누릴 만큼 누려고 있지 않았나 싶었던 것들이, 그러나 퀄리티 높게 누리려면 상당한 비용을 들여 장비를 갖추어야 가능했던 것들이 이제는 보편 평준화되고 있다. 무선이어폰과 연계되는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비용도 물론 만만치는 않지만 그렇다곤 쳐도 이미 스마트폰과 무선이어폰이 일상으로 파고들어 이제는 생필품처럼 되었으니 분명 고가의 오디오시스템과 구별된다. 또한 휴대해 다니면서 질감 좋은 음악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점점 더 발전해 현장성까지 누릴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발전될 보편성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를 겪어오면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지방의 발견이 아닐까 한다. 많은 것이 중앙집중식으로 얽혀 있다 보니 유명한 공연, 드문 전시, 훌륭한 강의는 서울에 가야 듣고 보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 역병이 세계를 멈추게 하고 난 후 온라인 공연, 전시, 강의가 제작되었다. 그간 비용 및 시간 문제 등으로 갈 수 없어 볼 수 없던 세계적 공연을 보고, 명사의 강의를 듣고, 작품을 더듬어 가는 장면 자체도 매체예술이라 할 만큼 훌륭한 전시를 만끽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나 현장으로 모두 돌아온 시점에도 온라인의 중요성은 지속적이다. 줌으로 강의를 듣고 줌으로 회의를 한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공연과 연주가 무료로 인터넷에서 상연된다. 극동, 한반도, 지방, 섬이라는 다양한 한계에도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만 살펴보면 양질의 콘텐츠를 누릴 수 있다. 언젠가는 내 머리를 따라 움직이며 현장성을 강조하는 무선이어폰과 스마트폰의 콜라보처럼 개인화, 평준화된 양질의 기술 발전은 상상 가능하다.
다시 글렌 굴드를 듣는다. 어떤 연주를 들어도 깊게 몰입한 사뜻한 연주들에서 연주자의 환희를 엿보게 된다. 곡을 향한 다양한 감정선과 다양한 변주와 다양한 해석의 표면을 미끄러져 내리는, 도취된 황홀감은 더 매혹적이다. 물론 굴드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들, 장인의 경지를 지나와 어느덧, 일종의 도인처럼 돼 버린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풍기는 면모가 있다. 세상을 나누는 모든 시공간 자타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보이는 여유와 평온함과 지극한 민감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언젠가 구글 검색 기능으로 호랑이를 스마트폰으로 불러냈다. 물론 화면으로 봐야지 보는 장면이었지만 짜릿하고 즐거웠다. 이 기술이 이동으로 인한 탄소발자국을 줄이기만 해도,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을 줄이기만 해도 인류는 감히 공존을 말할 자격이 생길 것이다. 우리가 향유하는 소위 품격 있는 아름다움들이, 생명 멸종으로 이끄는 데 앞장서고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공존을 위한 수많은 기술 발전의 결과는 하여 보편이어야 한다. 다양한 이유로 박탈당한 사회적약자에게도 아름다움도 지식도 경이도 선택하고 누릴 권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굴렌 굴드를 듣든 듣지 않든 그건 그다음의 일이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2023년 9월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