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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Sep 07. 2024

탈코르셋과 손가락

한때 페미니스트 내에선 탈코르셋 선언을 하고 일상의 꾸밈노동을 거부함으로써 성평등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중성화된 옷을 입으며, 화장을 하지 않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여성인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더불어 사회적으로 여성에게만 요구하던 성차별적인 꾸밈노동 강요에 대항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우선 나는 여성성의 강제에 대한 대항이라는 측면에서 삶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과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응원한다. 단순히 이론만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기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자되는 탈코르셋 논쟁의 문제는 그들의 탈코인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일부가 다른 여성들에게 이 운동을 강제하는 데 있었다.

그들의 논리인즉, 만약 여성들이 그들처럼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강제된 꾸밈노동을 한다면 사회적으로만 인정된 여성성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유지돼 온 사회적 강제와 성애화 된 여성성의 이미지의 고착과 지속에 도움을 주는 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꾸밈노동을 즐기고 수행하는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에 도움은커녕 백래시에 불과한, 타파되어야 할 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꾸밈 욕망이 과연 자신의 욕망인지, 사회적으로 학습된 욕망인지 들여다보라고 충고를 한다.

그러나 노선이 다른 페미니스트를 비판 과정에서 쏟아내는 증오언어는 놀랍고 끔찍하다. 꾸밈노동을 하는 이들은 페미가 아니라는 말은 양호하다. 명자(명예남성)로 호명하고 조리돌림을 학고 비난을 일삼는다. 내가 의아한 첫 번째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애화 된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유롭고자 시작된 운동이 왜 이토록 강요로 얼룩진 채 자행되는가. 왜 아름답지 않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남성화된 모습에서만 성평등과 자유의 외피를 찾아내는가. 남성과 유사하게 변화된 모습, 민낯과 짧은 머리와 티셔츠와 바지와 운동화만이 성평등과 자유에 이바지하는 걸까? 그들이 도무지 제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동북아 남성들이, 모든 여성이 짧은 머리와 캐주얼 복장과 민낯을 한다고 한들 성애화 시키지 않을까? 귀밑 2센티의 짧은 머리에 민낯에, 크고 헐렁한 교복을 입었던 몇십 년 전 여중고생들을 그들은 성애화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여기 첨부된 사진은 19세기 최고 미인으로 추앙받고 사랑받았던 카자르 공주의 모습이다. 당시 그를 사모한 13명의 사람이 상사병으로 자살을 했다고 하는 전설의 미인인데 현대의 미의 기준과 달라서 종종 남초카페에서 조롱받고 있다. 짙은 눈썹과 수염, 과체중으로 추정되는 둥근 모습에서 당시 남성들은 성욕을 느꼈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모두 짧은 머리와 민낯과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닌들, 젠더권력에 우위에 선 이들의 사회가 여성을 성애화한 다른 형식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는 거다. 글쎄.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모습에서도 성애화하고 그걸 또 강제할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어떤 노선의 성평등 운동이든 충분이 저항적이어서 충분히 지지할 수 있다. 다양한 노선을 인정하고 발전해 나가면 된다.


또 하나의 의문은, 왜 강제된 꾸밈노동의 저항이 남성화되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남성 중심적 한국 내 직장 사회는 T.P.O. 를 유독 여성에게 강요하며 과하지 않은 화장과 적당히 여성스러우나 조신한 복장을 강요한다. 꾸밈을 요구하되 그들 보시기에 좋은 형태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 부여된 강제 꾸밈 노동에서 나노미터 단위로 재단되는 현실에서 민낯 투쟁도 의의가 있지만 대중적 시각의 남성들이 거부감 일으키는 짙은 화장과 과한 복장으로, 흔히 말하는 센 언니 이미지로 저항을 하면 안 되는가. 사실 초기 넷페미 쪽에선 이런 논의도 오갔다. 기센 여자를 보면 두려워한다는 남성들의 기를 꺾기에 맞춤이라던 킬힐과 샤넬가방으로 무기를 삼던 그 사람들의 주장은 유효하다. 


출처 printerest.com 레이디가가

첨부한 사진의 여성가수처럼, 오히려 과도하게 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당당하고 공격적이다. 성의 주체로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행복한 방향으로 꾸미고 꾸미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 그걸 꿈꾸면 더 다채롭고 강력하지 않을까.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요구돼 오던, 여성만을 향한 꾸밈 노동의 균열을 내는 데에 한 가지 방식으로 일관하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저항한다면, 그게 더 효율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을까? 청순한 차림의 긴 머리의 여리여리한 여성이 방긋 웃으며 “꺼져!”를 내뱉는 것도 저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쪽에선 성정체성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훅 치고, 한쪽에서 기센 여성성으로 훅 치면서, 너희 남성 중심적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겠다 선언하고 저항하는 것이 혼란의 강도를 격렬하게 하고 균열의 빠르기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현재, 완전히 구시대 유물이 돼 버린 손가락 모양 때문에 조롱받고 멸시받았다고 상처 입었다는 남성들로 인해 나라가 들썩이고 이어 작품 작업을 한 개인의 직업마저 위태로워지는 걸 보면서 씁쓸하게 웃음이 났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차별화된 성평등 수준, 성상품화 지수, 성애화 정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증오언어는 구조적 폭력을 낳지 않지만 혐오언어는 구조적 폭력을 낳는다. 손가락 모양이 뭐라고, 아직도 여성의 가슴 크기를 서비스신으로 선보이는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허덕이면서, 성기 크기가 놀림받을까 봐 두려워 정의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양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논쟁은 차라리 발전적이었다. 미러링은 언제나 원본이 있다. 그 원본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던 여성에 대한 성인식을 드러냈다. 그걸 되받아쳤다고 문제가 되는, 여성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건 단 한건도 없다는 판결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히려 다양한 복장으로 손가락 챌린지라도 유쾌하게 이어가는 게 차별주의자들에게 품위 있게 대응하는 방법일 듯하다.


여성은 그 어떤 모습으로든,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본인이 원하는 무기를 들고 저항할 자유가 있다는 것, 그걸 한 가지의 방식만으로 강제할 근거도 이유도 없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게 인권의 기본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티를 입고, 몸이 모두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고 킬힐을 신고 때로는 민낯과 운동화와 짧은 머리로 세상에 나와서, 사회가 용인하고 강제하는 모든 여성 억압에 Fuck U를 날리는, 성별 상관없이 모든 당신들,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옳고 아름답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누구의 적도 아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강해지고 결국 사랑이 혐오를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2023년 12월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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