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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May 24. 2023

바람 지옥

유난히 운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은 평소보다 월등히 상쾌했다. 일어나 물 마시고 커피를 내리며 음악을 틀어놓고 춤도 췄다. 창을 모조리 열어 며칠 눅눅했던 공기를 날리며 하늘이 파란빛으로 환해서 웃음이 났다. 잡곡을 섞어 밥 짓고 외출 준비를 했다. 해야 할 오늘의 몫을 잘하고 돌아오자고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며 다짐했다.


불안한 조짐은 밖으로 나오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작됐다.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 불이 들어오길 바라며 서 있는 그 짧은 시간이 내내 몹시 추웠다. 감 잡기도 힘들게 온도가 유난히 오르내리고 바람은 자주, 태풍처럼 강하게 부는 봄이었다. 근처 공사장에서 몰려오는 흙바람이 차갑게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재채기하고 눈을 비비며 실내로 들어가면 괜찮을 거라 자신했다. 근거 없이 자신감 넘치는 습성과 쓸데없는 낙천성은 이런 데서나 작용했다. 실은 무엇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외투를 두꺼운 것으로 갈아입는 게 귀찮았다.


그러나 실내도 추웠다. 사월이 다 끝나가고 있었지만 평소 히터를 켜주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볕이 좋으니 좀 있으면 나아지겠지 다시 긍정적으로 자신하며 창가에 앉았다. 역시나 창이 큰 테라스 틈새로 바람이 신나게 들어오고 있었는데 정작 나가고 싶어 하는 벌레는 나가지 못하고 맴돌았다. 손쓸 수 없는 영역을 곁에 두고 미룰 수 없는 일을 처리한 후 신청해 놓은 강의를 들었다. 노동 시간과 페미니즘을 엮은 강의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 마치 빈칸처럼 처리되는 사람들의 삶에 정확한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좋은 강의였으나 계속해서 실내는 너무나 추웠다.


식사하러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이참에 외투를 하나 더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마우스패드를 반드시 챙겨 와야지 했지만 그새 잊은 채 내려와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섰다. 추웠다. 상의만 세 개를 입고도 추웠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을 헝클이고도 모자라 온갖 먼지를 흩뿌리는 세차고 힘찬 바람의 기운에 정신없었다. 자꾸만 억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봄인데, 진짜 봄에 이런 날씨 너무 심각하게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지구는 무심히 자전하고 공전하면서 밤낮과 계절을 흘려보내는데 나 혼자 시간의 흐름에 민감해하며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지만, 여전히 추웠다. 젠장 젠장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열어 앱을 켰다가 잠시 들여다보고 다시 닫았다. 저금리 시대를 살아가자니 가난한 내가 불쌍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투자한 주식이 화끈하게 아작 나고 있었다. 잊은 듯 묵혀두면 언젠가는 회생하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 보았는데 바이든 말대로 “이것이 자본주의”였다. 댓글 창에 곡소리들이 우렁찼다. 처음 해보는 주식이라 두려움도 컸기에 단타만 찍고 나와 볼 생각이었다. 이 모양이 된 게, 무시로 침투한 무기력에 잠겨 빠질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시간은 바로 돈이라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손가락을 넣어 빗어보아도 엉킨 타래가 풀리지 않는다. 운동이라도 하러 가려면 선크림이라도 발라야지 하며 꺼낸 선쿠션을 떨어뜨렸다. 발밑으로 침잠하는 기운을 좀 끌어올리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틀었으나 잠시 후 노트북이 와이파이 신호를 못 읽고 신호가 끊겨 버렸다. 집중되지 않아 좋아하는 노래라도 들으면 낫지 않을까 하고 선곡한 음악은 비트가 강한데도 이별 노래처럼 슬펐다.



모두가 각자의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


눈을 감고 내가 마주한 전장과 나를 마주할 이들이 마주할 지옥을 떠올렸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다고 조상님들은 입술에서 입술로 지혜를 전해왔다. 웃음소리도 눈물도 없이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오늘의 할 일을 마무리하는 내 마음속은 어이없어 웃어대다 엉엉 울어댄다. 내가 마주한 전장이 지옥이라도 타인에게 지옥을 보여주지 않아야 삶은 저 꽃들과 새처럼 고즈넉이 우아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지옥중생인 나는 기어이 귀가하면 스스로에게 화를 좀 내어야겠다고,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걷는다. 횡단보도는 빨간불이다. 더럽게 차갑고 센 바람이 내 머리에 원한이라도 진 것처럼 몰아쳐 헝클이고 있다.



*조윤제 지음, 윤연화 그림, <다산, 어른의 하루-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인생문장 365> 중에서,  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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