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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May 12. 2023

토끼풀 수풀은 슬프다

눈물보다 신음이 먼저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꽉 막아둔 몸과 마음의 문이 고압으로 팽창해 터져 나가듯 참고 눌렀던 고통이 사방을 부수고 마침내 터져 나올 때, 시작은 으레 비탄으로 만들어진 소리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오래 참아왔던 만큼 소리의 파괴력은 거대해서 슬픔의 모든 지표를 표면으로 끌어낸다. 몸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깨물고 바닥을 치고 때론 바닥에 몸이 엎어진 채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혹은 이어서 진행하기도 한다. 마치 전쟁 시작을 알리는 뿔소리처럼, 때론 한밤이나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가슴을 만신창이로 긁어내며 신음은 온몸을 한 바퀴 돌아 모조리 상처 낸 후 터져 나온다.


눈물이 힘겨운 이유는 바로, 이 과정에 있다. 많은 이들이 한참 울고 나면 안으로만 가둔 것들이 정화된 것처럼 개운해진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저 순서로 이어지며 상처가 칼날처럼 마구잡이로 찢어내기 때문이다. 비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몸에 고통을 남기기 때문에 그 통증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렇기에 울면 울수록 고통과 싸우는 지난한 과정에 남겨진다. 섬세하게 난자되는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 신음이 터지면 입부터 막고 가슴을 치며 가끔 머리를 벽에 박기도 한다. 울면 안 되었다. 울면 나는 너무 아파졌다.


조울증이 가져온 울증은 우울증의 우울과 밀도 면에서 조금 더 치밀한 면이 있다. 오랜 세월 중증 우울증으로 살아온 내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만큼 위태로웠던 내가, 이토록 울증이 무서운 줄은 몰랐었다. 몇 년에 걸쳐 진행하여 마침내 죽음으로 향하던 마음이 단숨에 단단하게 뭉치면 울증의 형태를 띠었다. 추락하는 감정과 파괴적인 감정은 가속력을 단 만큼 공격적이다. 순식간에 마음과 몸에 흉터가 늘어났다. 치미는 충동을 이겨내는 것이 우울증 시기보다 어려웠다.






언젠가 일본 드라마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에서 이런 내용이 나왔다. 토끼풀은 원래 세 잎인데 상처를 입게 되면 네 잎이 된다고. 그래서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토끼풀 수풀을 뒤적이고 헤적일수록 풀은 상처를 입고 그 덕에 네 잎 클로버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이 대사를 읽으며 내 울음은 네 잎 클로버 찾기 같다고 생각했다. 네 잎을 찾으려는 듯 구석구석 뒤지는 게 상처를 내는 과정이 동반되는 역설의 시간.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이라고 했던가. 상처받고 울어서 이르는 길이 평안이라는 행운으로 이르는 길이라면 그 행운은 이토록 먼 것인가. 그러니 울음이 슬픔에서 치유로 이어지는 구간에 있다면 내겐 치유로 향하는 길부터 모조리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시간인 것 같았다. 하나 내게 다시 세우는 힘이 남아 있었던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다시 세우는 것은 오래되고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갑자기 시작돼 의사조차도 조울증의 발현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전, 감당하기 힘든 울증의 바닥을 치면서 시작된 것은, 길고 긴 울음이었다. 참아도 보고 지인을 괴롭히기도 하고 술을 먹기도 하면서 감당되지 않는 통증을 지나는 동안 크고 긴 울음을 울었다. 울음이 후련함이나 평안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지인에게 죄책감만 남기는 감정이었음에도, 다행히 고통을 인정하는 시간은 되었다. 검열하는 자신에게 내리는 최후의 정언, ‘너는 아프다.’. 하지만 이것 하나 받아들이자고 다시 저 과저을 밟으며 울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도 고통스럽고 그 과정도 고통스럽고 그 이후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세 잎 클로버로 살고 싶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 하지 않던가. 행운을 찾으려 내 행복이 파헤쳐지지 않길 바랐다.


내 행복이 낮고 낮아서 작디작은
꽃을 피우고 수풀을 이루는,
매고른 토끼풀 같은 것이라 해도 좋았다.
그 누구도, 나 자신도 나를 설다루며 터울 거리면 안 되었다.



또 다른 일본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에서는 아플 것 같아 보이지만 흉터는 아프지 않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에 감탄했던 이유는 흉터야말로 비로소 닿게 되는 평안의 경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흉터는 결코 아프지 않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타인의 시선일 뿐, 자신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하여 신음을 시작으로 한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유무형의 흉터들은 평온의 상징이지만 고통의 징표이기도 하다. 고통을 지나오지 않은 사람에겐 흉터가 없다. 당연하게도 그 깨끗한 상태의 평온과 동일할 수 없다. 그렇기에 흉터는 얼어붙은 겨울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땅안개처럼 서늘하고 슬픈 평온을 준다.


마음 한 켠을 흔들어 대 보면 내 안에서 우수수 네 잎 클로버들이 쏟아져 내릴 테다. 하지만 나야, 나는 결코 토끼풀 숲을 더듬어 네 잎을 구경하지 않겠다. 칼날 같은 상처로 상처를 만들어 내며 보이는 것보다 늘채는 흉터가 이윽고 홋홋해질 때, 토끼풀의 흉터를 들여다보겠다.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쓰다듬어 주겠다. 그리고 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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