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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May 10. 2023

거섶과 연주자와 작곡가와 산

봄이 오면 부모님은 바빠졌다. 산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버지는 봄이 되면 그간의 게으른 생활을 청산이라도 하는 듯 산으로 숨어들었다. 날씨가 따스해질수록 바빠지고 그만큼 신나 보였다. 가끔 엄마와 함께 산을 오르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배낭이 넘치도록 산 냄새로 가득했다. 문실문실 자라나는 나뭇가지와 부드러워진 땅을 헤치고 피어오른 각종 식물의 여린 잎들. 그들이 골라 따온 식재료들은 향긋하고 부드러웠다. 그걸 다듬고 데치고 무쳐 반찬을 만들면 밥상은 산을 옮겨 놓은 듯 풍성했다.


요 며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배송되는 대형마트에서 각종 나물 반찬 세트를 구매해서 갓 지은 밥에 올려 달걀부침을 올리면 꽤 먹음직스러워졌다. 총 여섯 가지 나물무침이 있었기 때문에 색도 예뻤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게도, 잎새와 가지가 질긴 나물무침은 그다지 향기롭지도 맛있지도 않았다. 그저 인스턴트를 좀 줄였다는 자기 위안만 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거섶을 골고루 만들어 비빔밥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여리고 부드러운 나물들을 올려서 쓱쓱 비벼 주었다. 나물들 각각의 향이 어우러진 그대로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 향내가 몹시도 훌륭해 달걀이나 고추장은 오히려 거슬릴 뿐이었다. 약간의 참기름은 나물들의 향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순하고 착하고 맑은 맛, 그 담백함이 가끔 뭉클할 만큼 그리울 때가 있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물릴 만큼 반찬 투정이 심하던 아버지도 이때만큼은 기꺼워했다. 당신이 따온 것이라는 자부심과 엄마의 손맛을 사랑한 이유가 뒤섞여 자식에게도 과도하게 먹이고 싶어 했다. 고로쇠 물이라든지 각종 야생 열매라든지 지금은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생소하던 버섯이라든지 그런 걸 먹이려 하면 낯설어 괴로워하다가도 입속은 이내 터질 듯한 감탄을 같이 삼겨내곤 했다. 세월이 흘러 조카들이 맛나게 먹을 때면 내가 더 흐뭇했다. 작은 손과 입으로 오물오물 먹는 걸 보면서 건강하고 향기로운 것들 더 먹어, 더 먹어하며 마음속으로 응원하기도 했다.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체감하는 나날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큰 수술을 하고 난 후로는 봄을 알리듯 집안 가득 넘쳐나던 온갖 나물과 버섯 향을 맡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산을 전체적으로 통제하기도 하지만 산에 올라 각종 자연 먹거리를 가져올 사람도, 더는 없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수천억의 사연들이 느리게 멀어지는 걸 바라본다. 이 구체적인 아름다움들은 과거 속에 박제되어 내 머릿속에만 간직될 터이다.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세월은 그래서 서글플 때가 많다. 어쩌면 그렇기에 살아가는 존재의 구석 어딘가는 기본적으로 고통이 스며있는지도 모른다.






임윤찬과 광주심포니오케스트라의 협연을 듣고 있다. 베토벤의 황제 2악장이 흐를 때 하필 거리에 있었다. 햇살이 촘촘히 내리며 사물에 부딪혀 부서지는 정오의 눈부신 시간 속에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이 곡이 찬란한 것은 작곡가와 연주자가 시대를 거슬러 협력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묘비를 새기듯 정성스러운 작곡가와 그 곡을 정교하게 분석하여 완벽을 추구한 연주자 들의 현재가 마주한 광경을 들으며, 두려움 없는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떠나보낼 것을 알고 있기에 이미 슬프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호해지는 마음의 강건함은 날카로울 만큼 찬란했다.


부모님이 가져온 산의 향기는, 그 향기를 최상으로 옮긴 엄마의 손맛은 기억 속에서 곰삭아 아련하고 희미한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과거는 기억 속에 살아있음으로 인해 현재가 된다. 다시는 만질 수도, 들어볼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산 내음과 엄마가 만든 풍성한 거섶들의 추억은 돌이킬 수 없다 해도, 내가 살아 있어서, 슬픈 기억만은 아니다.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흐른다. 아름다운 기억을 뒤로 하고 살아가는 슬픔은 이 곡만큼이나 애절하지만 죽음과 시대를 거슬러 성사된 예술가들의 현현이 연주 속에서 환희가 된다. 슬픔이 담아내는 환희를 눈감고 감상한다. 기억과 연주가 빚어내는 감미롭고 애틋한 향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기억으로 스민다. 하여 수천억의 환생은, 일상에서 이토록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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