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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May 31. 2023

친구는 나의 힘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었다가 카페에 들러 꺼냈다. 반짝이가 잔뜩 핸드폰에 묻어 있었다. 왜지? 잠시 생각해 보니 지난번 나무로 된 집게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세탁한 게 떠올랐다. 주머니를 잠근 상태로 세탁기에서 생존한 집게는 다행히 무사해 보였다. 문제는 트레이닝복 상의 주머니에 있었다. 집게를 예쁘게 장식했던 반짝이들이 오소소 흩어져 주머니 속을 뒹굴고 있다. 털어내어도 숨어 있던 녀석들은 빼꼼 고개를 내밀기 일쑤였다. 성가시게… 이 주머니는 당분간 아무것도 넣을 수 없겠네 하며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붙안은 반짝이들을 털어냈다. 떨어지는 반짝이들은 이름 그대로 반짝반짝하면서 공중을 휘돌아 내려앉았다. 손도 바닥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문득 이걸 선물한 친구가 떠올랐다. 반짝이는 빛처럼 다가왔던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입 안으로 굴리며 잘 지내니? 물음을 보냈다. 덕분에 나 반짝이 사람 됐어. 하면 그이는 속없는 사람처럼 웃을 테지. 반짝이 사람이 되고 보니 반짝이가 예뻤다. 멀리서 바라보면 작게 부서지는 크리스마스 전구 빛 같을 것이다. 나도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오늘은 큰마음을 먹고 모 미술 여행 프로그램을 신청했던 날이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조금의 불안과 조금의 설렘을 안고 무엇보다 컨디션을 잘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며칠 전 무척 아팠을 때는 덕분에 속상한 마음이 컸었다. 지난밤에, 오래된 모델이라 충전과 유지 시간 모두 짧은 카메라를 미리 충전해 두고 만일을 위해 해열제와 안정제, 비타민과 안약 등의 상비약을 가방에 넣고 무선 이어폰도 충전을 완료해 놓았다. 반드시 가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는 시간을 못 견뎌하는 만큼 이번에는 거기에 머물며 다양한 작품을 바라보고 감상하며 내 안의 어떤 지점도 충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선 왜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을 마시고 커피를 내리고 스트레칭을 해 보아도 불안감은 자꾸만 커져서 마침내 숨쉬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갈 수 없다는 마음이 완강하게 뿌리내렸다. 집합 장소가 걸어서 20분이 채 되지 않는 곳이라 시간은 넉넉하다 못해 넘쳐났다. 그러나 울고 싶을 만큼 갈 수 없다는 말은 주문처럼 물길을 만들고 부풀어 마음을 지배했다. 담당자에게 몸살이 났다는 거짓말과 정말로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나서야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십 분도 안 되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그것도 못 하니? 너는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니? 나를 물어뜯어 내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생각을 단절하기 위해 외국어 앱을 구동해 오늘치 학습을 강행했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틈틈이 우울한 생각은 침입해 들어와 머릿속을 할퀴었다. 꾹꾹 누르며 공부를 한 것도 무색하게 밀려오던  우울감은 이내 정수리 끝까지 찰랑댔다. 자주 사용하는 SNS에 접속해 이런 상태를 웅얼거리고 나왔다.


뭘 끄적여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특정인에게 말하는 걸 잊은 것처럼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터라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그곳에 터져 나오는 말들을 적었다. 나는 대상이 한두 명 혹은 소수로 정해진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잘 못하는 사람, 대상을 추정하기엔 다소 대중없을 때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나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게 스몰토크나 소집단 토론보다 편안했다. 그러니 내겐 친구로 묶인 사람들이라 해도 무작위로 노출되고 무작위로 대화를 할 수 있는 SNS의 소통에서 부담을 덜 가졌다. 어차피 사람이란 타인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니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관조하는 대상들에게 말을 건네는 게 서로가 상처를 덜 받는 일이라 생각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전을 보내고서야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고 가방을 다시 털어 요즘 노트북을 지니고 다니는 가방에 정돈해 옮겼다. 친구가 선물한 미스트를 뿌리고 친구가 선물한 보습크림을 바르고 친구가 선물한 선크림을 토닥였다. 친구가 만들어 선물한 향수를 뿌리고 친구가 만들어 선물한 인형에게 인사를 했다. 나츠메, 다녀올게. 괜찮다고 등을 떠밀어 준 친구의 댓글을 읽고서 친구가 보내준 텀블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친구가 보내준, 아직도 많이 남은 빵과자를 가지고 나오지 못해서 안타까웠지만 다음엔 그것도 챙기고 다음엔 친구가 보내준 향기로운 차 티백을 생수에 담을 예정이다. 이 모든 걸 건넨 이들은 느슨한 관계망이라 생각한 SNS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나와서 서니 햇살 속이었다. 언젠가 나는 내가 너무 싫다고 했을 때 나는 네가 통째로 좋기 때문에 네 속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던 친구의 말이, 쏟아지는 햇빛과 몰아치는 바람 속에 선명했다. 아, 나는 조금 외로웠구나.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그걸 알아차린 너희들은 다채로운 모습으로든 존재를 알려주는구나. 주머니에서 뿌려지던 반짝이의 흔적처럼,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드물지만 정확하게 내 눈을 직시하고 있었구나. 두드러지지도 않고 성긴 관계, 눈앞에 보이지도 목소리를 잘 들려주지도 않는 멀고 다정한 친밀함의 상냥함을 생각한다. 바라보면 창밖의 풍경은 실내에선 잡히지 않는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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