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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Jun 07. 2023

비 내리는 풍경이 짙다

비가 내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비는 내게 이내 축축해지는 운동화나 습하고 더러운 냄새 가득해 멀미 나는 꽉 찬 버스 속이나 교통사고가 크게 난 이후부터는 아파도 몸을 일으켜 출근해야 하는, 불쾌하고 괴로운 기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직원들과 나눠 마실 커피를 사고 돌아 나온 길에 미끄러져 발목 인대가 파열된 이후로는 비가 내리면, 미끄러져 다칠까 봐, 그래서 내 몸 하나 지탱하는 게 고역인 시간이 이어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두 달 가까이 앓아누웠었다. 목발 생활을 몇 달 하면서 사무실에서만 머무는 직업이 아니었던 터라 그렇지 않아도 무너져 내렸던 마음과 몸에 더 실질적인 고통이 더해진 상황이었다. 비는 내게 그다지 너그럽지 못했다.


비가 내리면 낮부터 어두운 방 안 침대에 파고들어 따스한 기운을 만끽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거나 소셜미디어들을 오가며 유쾌하고 가벼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좋았다. 저기압이 주는 두통과 몸살기에도 진통제 먹고 이불속에서 부빗부빗하는 건 시간은 솜사탕처럼 폭신하고 달콤했다. 나는 이 달고 폭신한 시간을 사랑했다. 누구나 아는 유행어나 농담 같은 것을 주고받으며 눈을 접어 웃으면 부서지는 웃음소리들이 별사탕처럼 쏟아지는 시간들처럼, 혼자 있는 비 내리는 날의 오후와 그때의 이불속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향 같은 것들을, 나는 사랑했다.


비가 내리면 습해져서 제습기를 돌려줘야 하는 녹록한 제주의 기후는 자칫하면 곰팡이를 달고 왔다. 첫해 내내 싸웠던 곰팡이와의 전쟁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 뿐 아니라 아껴둔 물건들을 앗아갔다. 깊고 넓게 침투한 곰팡이는 손쓸 수 없게 사물들을 망가뜨리고 앗아갔다. 지금은 조금 더 살 만한 바다 가까운 지역으로 내려왔고, 지금은 또 조금 더 살 만한 층수에서 살아가면서 습기는 덜 괴로운 일이 됐다고 하지만 역시 물기가 손끝에 맺힐 듯 습한 날, 제습기를 틀면 습도가 90을 넘기 일쑤였다. 나의 솜사탕 같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제습제를 교체하고 주기적으로 제습기를 가동해야 했다. 그 노력에 보상하듯 뽀송뽀송해지는 순간이 오면 공중에 얼굴을 부빗부빗하고 싶어졌다. 적당하게 건조해 쾌적한 공기가 기꺼웠다.


비가 내려 제습기를 돌려놓고 집을 나섰다. 이불속이 달큼하고 뽀송했지만,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감각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에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매번 잠겨 들고 매몰되는 상황이 부대꼈다. 외출해야 할 때마다 괴로운 건 그만두고 싶어졌다. 비 내리는 날뿐 아니라 유사한 여러 상황에서 조금 더 다채로운 감각을 갖고 싶어졌다. 비가 내려서 좋다, 싫다로만 나눠진 감정은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로지 그 감정 자체에 묶이기 좋았다. 아니 묶여왔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묶어 끌고 간다면 내버려 둘 수 있었을까? 절대로, 단언컨대 발버둥 쳤을 터다. 자유가 강제되는 시간을 못 견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왜 이토록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단정적일 만큼 단순하게 호오(好惡)로만 얽매인 삶을 살았던가.






비가 내린다. 순일하게 피어오르는 감각으로 매번 달랐을 비와 매번 달랐을 공기의 흐름을 누리고 싶다. 길을 나서서 카페로 들어서는 짧은 시간을 우산 없이 걸었다. 우산이 답답해서 잘 챙기지 않는 게 습관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잠깐이라도 비를 맞고 싶기도 했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와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몸으로 담는다. 커피 향은 둔중해진 머릿속을 건드리고 테라스 밖 초록이 무성해지는 가로수가 비에 젖어 무심히 짙다. 바람이 잎새 사이를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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