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거리'

책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에서

by 이정식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쉽고, 공정하게 어렵다. 사랑은 신의 축복이어서, 그것은 고작 욕망, 본능, 감정의 화학작용일 뿐이라고 여기는 '불신자'는 결코 복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결코 사랑에 빠지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두 종류의 사람은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사랑의 불신자'는 사랑을 냉소하는 태도를 택한다. 사랑이 없다고 믿으므로,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누군가와 만나거나, '사랑'을 남용하기도 하며, 때론 그 감정을 없애버리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사랑이 공정하게 어려운 이유는 사랑을 짓밟고 무시하는 그들의 태도 그대로, 사랑이 그들의 내면을 짓밟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은밀히 소외된다. 아주 가만히 진행되어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만 축복의 당사자에게 사랑은 공평하다. 그들이 사랑에 마음을 열어젖힌 것만큼 공평하게 사랑도 그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런데 사랑이 들어갈 때에만 쉽고 어려운가. 쉽고 어려운 것은 사랑을 하는 중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인간의 감정이 그렇듯, 사랑을 보편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무용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한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 우리는 간신히 '부정의 방식('-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으로만 다가설 뿐이다. 사랑은 보편이 아니라,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혹은 사랑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말할 수 있는 건 당사자인 두 사람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지젝의 지적은 옳다. “사랑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가 금방 분명해진다.”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그 무엇보다 주관적이기에 쉽고, 어떤 것보다 객관적이지 않기에 어려운 사랑은, 이 점에서 또다른 위험성을 내포한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사랑이, 건강하지 않고 병리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왜 우리의 사랑은 그토록 쉽게 병드는가. 왜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종종 사랑을 끙끙 '앓는가'. 병든 사랑을 진단하다보면, 그것이 다름아닌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사랑을 낳은 부모, 두 사람 각자에게 동일한 비중의 책임이 돌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책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에서는 소냐와 프랑크라는 연인이 등장한다. 나르시스트인 프랑크는 처음 소냐에게 친절하고 다감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폭력적으로 변한다. 제 기분대로 폭언과 손찌검을 마구 소냐에게 쏟는다. 그런데 소냐는 프랑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왜? 그녀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바르데츠키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진단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론 폭력을 행사하고 공공연히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거짓말을 남발하는 프랑크의 문제가 더 크다. (중략) 그리고 그런 남성에게 고통받는 여성은 못된 짓을 당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주로 이런 여성은 자신에게도 악의가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흑백논리는 현실과 다르다. 두 사람 모두 이 파괴적인 관계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스스로 남성의 곁에 남았다면 두 사람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 배르벨 바르데츠키,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181.



나는 이 문제를 젠더갈등으로 비화하려는 것이 아니다.(두 사람의 성별이 바뀌어도 좋다) 병든 사랑의 원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이미 두 사람의 내면이 병들어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만 생각하는 지독한 나르시스트인데, 혼자라는 외로움이 두려워 그러한 태도를 용납해주기만 한다면, 사랑이 병들어 시들시들해져가는 것을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나르시스트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의 세계에서만큼은, ('나만 사랑하는') 나르시스트야말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사랑의 건강관리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부모인 두 사람의 내면건강관리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두 사람의 성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에 빠졌어도 우린 때때로 숨 돌릴 여유가 있어야 하고, 각자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나는 이 문장에서 오래전 보았던 한 책이 떠올랐다.



"내 나름의 비법이 있기는 하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세상을 원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나는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도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임을 인정한다. 삶이 사랑과 환희와 성취감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좌절과 슬픔, 상실과 이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인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훌륭한 문학, 연극,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적당한 거리'다. 연극의 경우, 어떤 연출자는 의도적으로 관객이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고(브레히트의 '소격 효과'), 영화에서는 클로즈 업이나 익스트림 롱 쇼트로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를 아주 가깝게 만들거나, 혹은 멀찍이 떨어뜨려놓거나한다. 이를 통해, 패턴과 리듬을 만들어 인물의 심리 혹은 주제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클로즈업으로만 보고있진 않은지. 이제 롱 쇼트로 시점을 전환해야할 때는 아닌지. 상대방과 나 사이의 여백으로, 슬픔이나 원망 같은 격한 감정들을 묻어둘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면, 어려웠던 사랑이 조금 쉽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지만 숱한 영화 중에서 거리두기에 성공한 '걸작' 영화가 소수라는 것을 떠올리면, 역시 사랑은 어렵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조금 웃었다. (2019. 6. 9. Sun)




인용 책


1)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2)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의길.

3) 배르벨 바르데츠키,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다산초당.





책 정보







제 목 :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저 자 : 배르벨 바르데츠키

역 자 : 한윤진

출판사 : 다산초당

페이지 :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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