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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r 07. 2018

그 시절은 과연 지나갔을까.

영화 <더 포스트>

‘그 땐 다 그랬지’. 이 문장은 마치 마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과거를 지나온 사람을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로 올라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기 즐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채색된 과거는 (실재와는 달리) 황홀하며 아름답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과거는 채색되지 않았다. 무채색이고, 남자들의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울리며, 담배 연기가 자욱해 잔기침이 콜록콜록 나오게 되는, 그런 곳과 비슷하다.



영화 <더 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는 1971년 미국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펜타곤 페이퍼’사건(전쟁을 정당화 시키는 미국 정부의 조작이 담긴 보고서)을 조명하며, 그 이야기는 원심력있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목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그칠기미를 보이지 않고, 되려 불리한 판세가 되어버린다. 정치권에서 군대를 철수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 그 사이에 미국 군인의 목숨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 삼켜지고만다. 이 와중에 ‘펜타곤 페이퍼’가 뉴욕 타임즈에 의해 처음 세상에 밝혀지고, 이어 워싱턴포스트가 다시 미국 전역에 이 사건을 터뜨리게 되는 이야기다. <더 포스트>는 어떻게 펜타곤 페이퍼가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는지, ‘워싱턴 포스트’지의 속내는 무엇이었는지 등 막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더 포스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워싱턴 포스트의 회장이다. 그러나 회장인 그녀에게는 아무런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초반, 그녀와 편집장인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함께 식사를 하는데, 둘 중 누가 보스인지조차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중 벤이 그녀에게 ‘보스’라고 말한 뒤에야, 비로소 관객은 둘의 위치를 구분할 수 있다) 그녀는 이사회의를 주재하면서도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준비한 말을 수없이 되뇌고, 프리츠(트레이시 레츠)와 시뮬레이션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이사진의 날카로움에 압도당하고 만다. 



영화 <더 포스트>


캐서린은 회장감이 아닌걸까. 다른 사람이 그녀를 향해 내뱉는 조소처럼, 정말 '전회장의 부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무능력한 사람이 회장이 된 걸까. 영화 <더 포스트>는 관객이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 시대의 흔적을 영화 곳곳에 남겨두었다. 부부 동반 식사 중,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여자들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고, 따로 모인 여자들의 이야기 주제는 ‘뉴 스타일 섹션’이나 가십거리며, ‘여자’가 집안일과 바깥 일을 하는데 괜찮냐며 캐서린에게 악의없는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주주총회에 입회조차 못하고, 투자자들이 워싱턴 포스트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가 발행인이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불평하는 쇼트는 그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니까, 여자는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영화 <더 포스트>

 

‘그 때는 다 그랬’던 것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 외에도 몇가지 더 있다. 그 때는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도 이상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초대 회장인 그녀의 아버지와 2대 회장인 그녀의 남편 모두 당시 대통령과 친밀했다. 사정이 이러니, 언론이 정부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이제 끝나야 한다. 실제로, 언론과 권력이 친밀하던 시기는 끝났다. 이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시기다. 그러나 언론이 그렇게 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상대가 닉슨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닉슨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게 권력을 동원해 페널티를 준다. (영화는 닉슨의 목소리를 마치 ‘전화 속 목소리’를 도청하는 것처럼 들리게 함으로써 그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풍자하기도 한다)  

 

내내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던 캐서린에게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온다. 워싱턴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회사 임원들과 즐기는 파티에서 난데없이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되는 그녀를 향해 전화기를 든 네 명의 인물(프리츠, 벤, 아서, 필)은 계속해서 결정을 하도록 묻는다. 카메라는 전화기를 든 캐서린을 향해 서서히 줌 인해 들어가며, 보기만 해도 숨막히는 그녀의 몇초를 끝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한다. 아마 이 신(Scene)은 영화 <더 포스트>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아닐까. 


영화 <더 포스트>


수많은 망설임 끝에 나온 그녀의 결정은 펜타곤 페이퍼를 발행한다는 것. 늘 프리츠의 의견대로만 하던, 수동적인 그녀가 처음 ‘주체적으로’ 결정했다.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것은, 그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고, 그녀처럼 비슷한 차별을 받던 이들의 작은 연대가 있었다고, 영화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 사무실로 ‘계시’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 펜타곤 보고서의 소스들, 역시 ‘계시’처럼 알려주는 (보고서의 출처자인) 댄의 전화번호는 이 일이 단순히 한 개인의 선한 의지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정부와 사회적 분위기가 의도치 않게 규정해버린 약자들(여자, 파병군인의 유가족, 유색인종, 노인 등)이 뚫고나오는 연대의 힘이었다. 영화는 재판이 끝난 뒤, 포토라인 앞에서 ’뉴욕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를 맞이하는 사람이 각각 누구인지를 비춰줌으로써 (뉴욕타임즈는 기자들이 맞았지만, 워싱턴 포스트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누구를 주목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펜타곤 보고서를 함께 폭로했지만, 왜 ‘뉴욕타임즈’가 아닌 ‘워싱턴 포스트’인지까지도 관객에게 설득하고야 만다. 



영화 <더 포스트>


그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 정권을 유지하려고 아무 목적없는 전쟁에 청년들이 부당하게 동원되는 것과 권력에 쓴소리를 하는 언론을 위협하는 정부, 심지어 여성이 천대받는 비정상이 상식처럼 통용되던 매우 이상하던 그 시기는 이제 끝이 났다. 하지만, 분명 끝이 났고 지나가버린 시기인데, 현재에도 이토록 실감나고 생생하게만 느껴지는 아이러니는 무슨 감정일까 도대체. 그래서 그 시기를 다 지나가버렸다고 과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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