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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an 25. 2019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영화 <증인>

이 글엔 영화의 내용이 조금 담겨있습니다.




눈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거짓말입니다” 지우는 방금 읽은 시에 대해서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라고. 눈은 차가운데, 어떻게 지붕과 길과 밭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이불이냐고. 윤동주의 낭만적인 이 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지우에게만큼은 냉혹한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의 단면을 드러내는 글이 된다. 



영화 <증인>


잘 나가는 LEE&U 로펌 소속에, 직장 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순호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로펌의 대표는 순호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미래에 이 로펌의 대표가 되어달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살인 사건 용의자의 국선변호인이 되어달라는 것. 피해자의 가사도우미였던 용의자는 무죄를 눈물로 호소하지만, 문제는 혐의로부터 벗어날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데 있다. 그때, 이 사건을 유일하게 목격한 지우(김향기)-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 별 기대가 되지 않는-에게 순호는 사건의 실마리를 알기 위해 접근한다. 


얼마 전 <강철비>에서 몸에 착 감기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정말 잘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준 정우성은 이번 <증인>에서 지적인 변호사 역할 역시 얼마든지 소화해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강철비>에서 자신이 훌륭한 액션배우임을 드러냈다면, <증인>에서 그는 액션 이외에 감정을 담담히 표현하는 역할 역시 잘 해낼 수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향기의 많은 힘을 싣지 않은 연기 역시 좋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고등학생을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혹은 과장되게 희화화하지 않고 표현한 것은 확실히 좋다.



영화 <증인>


좋은 영화는 사건의 격변을 과장하지 않는다.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 안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응시한다. 영화 <증인> 역시 사건의 격량보다 사람의 내면에 초점 맞춘다. 이 영화가 응시하는 순호, 지우 둘은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조금 변화한다. 출세만을 바라보고 앞달려갔던 순호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사람을 보게 됐고, 자신의 세계에만 있던 지우는 이후 두터운 마음의 창문을 연다. 


이 영화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듬뿍 배어있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고등학생이라는 설정은 사건의 미스터리를 증폭하려는 목적으로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겪는 삶의 불편함을 과시하지 않고 찬찬히 바라본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질문하기도 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그래서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대사의 대부분은 질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증인>



“다리가 불편한 사람과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우와 소통하는데 어려워 도움을 청하는 순호에게 회중(이규형)은 질문형식으로 조언한다. 함께 천천히 걸어야지. 지우와의 소통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일러주려는 듯. 그는 이어 말한다. “당신이 거기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회중의 말을 들은 순호는, 그제서야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운 것인지 모른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전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살인 교사한 아들이 순호에게 처음 건넨 말인 “당신은 사람을 믿으시나 봐요.”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마치 지금 이 사람은 사람에 대한 불신, 연민없음이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것처럼.



영화 <증인>


순호가 사람과의 소통을 배웠다면, 지우는 세계를 배웠다. 나와 다른 세계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에요. 신애는 웃는데 나를 이용하고, 엄마는 화난 표정을 하는데 나를 사랑해요.” 지우에게는 모든 세계가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으므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그래서 택한 방법은 표정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웃음은 기분 좋은 것, 입꼬리가 내려간 화난 표정은 기분 나쁜 것. 그러나 애초에 사람은 표정과 속마음이 완전히 일치하는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우가 신애와 엄마의 감정이 모순처럼 느껴져 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우는 순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아저씨는 나를 보며 웃는데, 아저씨도 나를 이용하려는 겁니까?”


그때 순호의 따뜻함이 지우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는 변호사인 순호가 ‘지우의 변호인’이 되고, 지우는 ‘순호의 증인’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순호는 처음 용의자의 변호인으로서 그 사건을 목격했다는 지우를 향해 “자폐라는 정신병”이라는 망언을 한다. 그랬던 순호가 2차 공판에서 완전히 입장을 바꾼다. “우리가 편견을 갖고 저 아이를 바라봤다”라고. 용의자를 변호하던 순호는 이제, 지우를 변호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로펌의 대표는 당황하며 다그친다. “양순호 미쳤어?” 이때, 순호는 대답한다. “변호사도 사람입니다.” (영화 초반, 순호는 로펌의 대표가 말한 ‘판사도 사람이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주어를 바꾸어 말한다) 그리고, 지우는 또 다른 증인이 된다. 그 자리에서 ‘좋은 사람’ 임을 증명한 순호를 똑똑히 목격한 증인.



영화 <증인>


문을 닫고, 늘 자기 세계 안에서만 만족했던 지우는 재판이 끝난 이후 그제서야 방의 창문을 연다. 그리고, 창 밖으로 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새하얀 눈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듯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저렇게 작고 연약한 것을 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은 왜 이리 아늑해지는 것일까. 그 광경을 유심히 응시하던 지우는 희끗한 손을 뻗는다. 내민 손가락 위로 내려앉을 작은 새를 맞이하려는 것처럼. 



눈 - 윤동주 

지난 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처음 이 시를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지우는, 이제서야 윤동주의 <눈>을 조금 이해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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