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Jan 31. 2019

'음식 영화'의 목적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의문했다. 음식영화는 왜 음식과 삶을 자주 연관시키냐고. 나는 바로 답하지 않고 앞에 놓인  그릇에서 라면 한 젓가락을 들었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아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들어 올린 라면을 나는 금방 삼켜먹었다. 실제로 그랬다. 영화에서 음식은 큰 진폭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인간이란 단지 생존하기 위해 먹는다는 동물적 본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삶의 철학을 음식에 곁들여 ‘먹는다’는 행위의 고상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은 제 몸 움직여 경작한 농작물을 재료로 삼아 정성껏 요리한다. 그녀가 음식을 예쁘게 담아 음미하며 먹는다는 건 소소한 일상을 그만큼 어여쁘게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최근 개봉한 <완벽한 타인>에서 석호(조진웅)는 와이프의 충격적인 비밀을 눈치채고 티라미수 케익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내내 젠틀하던 석호가 그 답지 않게 음식을 입으로 욱여넣는 건, 엄청난 아픔을 어떻게든 애써 삼키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버닝>에서 벤(스티븐 연)은 ‘요리는 나 자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이며, 음식은 제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음식을 입으로 먹어 ‘나의 일부’로 삼는 것처럼, 영화는 음식의 다양한 의미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왕성한 식욕으로 우리에게 펼쳐낸다.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에서 카메라는 어떤 맛을 음미했을까.


마사토(사이토 다쿠미)는 아버지(이하라 쓰요시)의 라멘 가게 일을 돕는다. 아버지가 만든 라멘은 타카사키 시 내에서도 소문난 맛집인데, 마사토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라멘을 더 좋아한다며 서운해한다. 서먹했던 아버지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마사토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엄마(재닛 아우)의 일기장과 사진, 외삼촌의 편지를 발견한다. 마사토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난 엄마는 싱가포르가 고향이었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쌓인 일기장을 마사토는 천천히 응시하다가 결심한다. 잠시 가게 문을 닫고, 싱가포르로 가기로.  싱가포르에 사는 맛집 블로거 미키(마쓰다 세이코)의 도움을 받아 마사토는 외삼촌(마크 리)을 만난다. 마사토는 그에게 ‘바쿠테’(싱가포르 현지 음식) 레시피를 배우고, 엄마와 아버지의 만남에 얽힌 사연을 듣는다.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



에릭 쿠 감독의 카메라는 절제된 듯 심플한 미장센을 담아 스크린에 플레이팅 해놓았다. 언뜻 평범한 것 같은 쇼트는 소박하고 담백하다. 그 위에 살짝 뿌려주는 조미료처럼 배경음악 역시 깔끔하여 적절하다.


‘바쿠테’는 돼지갈비를 푹 고아 우려낸 국물에 마늘과 허브, 향신료, 약제를 넣어 만든 싱가포르 국민의 대표적인 소울푸드다. 과거에 무거운 짐을 나르던 노동자들이 고된 일을 마친 다음 ‘바쿠테’ 한 그릇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게 유래가 되었다고. (우리나라로 생각하자면, 갈비탕 혹은 돼지국밥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 나라 사람들은 바쿠테를 ‘그냥’ 먹는 게 아니다. 그들은 고유한 문화적 문맥, 삶의 애환, 견뎌온 세월의 터전 속에 들어앉아 먹는다.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



그렇게 먹는 음식의 맛은 그냥 음식 맛이 아닐 것이다. 지나온 시간의 맛이고, 오랫동안 간직해온 추억의 맛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서글픈 맛이기도 하고, 차마 못 견뎌 흘러나온 눈물이 들어가 짭쪼롬하기도 할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먹는 아버지의 라멘이 서글펐고, 아버지와 마사토에게 만들어준 엄마의 바쿠테는 황홀했다. 사랑하는 딸이 원치 않는 일본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할머니의 바쿠테는 외면하고픈 씁쓸한 맛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영영 먹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사토는 할머니를 위한 새로운 음식을 만든다. 일본의 라멘과 싱가포르의 바쿠테를 조합해서 만든 ‘라멘테’를. 극의 감동적인 말미에서 마사토는 외할머니와 바쿠테를 함께 먹는다. 그렇게 외할머니와 딸이, 남겨진 자와 떠난 자가, 싱가포르와 일본이, 음식과 삶이 비로소 만찬을 즐긴다. 영화는 어떤 관계에 놓인 사람일 지라도, 음식 하나로 해원할 수 있다는 무모한 낙천을 사랑스럽게 드러낸다.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



글의 처음에서 물었던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할 차례가 온 것 같다. 음식 영화에서 삶과 음식을 자주 연관 짓는 이유는 음식이 바로 우리 삶이기 때문이라고. 매일 반복되는 세 번의 식사는 사소하고 별 볼 일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 사랑스러운 일상이라고. 너무 익숙하여 별 감흥이 없는 일상의 귀중함에 카메라를 가져다대는 것. 이것이 영화 <우리가족: 라멘샵>의 라멘과 바쿠테의 의미이자, 군침 도는 ‘음식영화’의 목표가 아닐까.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다시 라면을 먹는데 집중했다.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소중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보도되었습니다. (2019.2.10.)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510625


매거진의 이전글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