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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Feb 04. 2019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어떤 영화는 황홀하여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다. 이대로 꿈에서 깨지 않기를. 좀 과장해서 차라리 극장 밖 현실이 영화가 되었으면. 그래서 셀마의 대사가 유독 와닿았다. “난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요. 그래서 언제나 엔딩 전에 극장에서 나오죠. 그러면 영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거예요.” 셀마에게 좋은 팁을 받았건만, 나는 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극장을 나오는데 실패했다. 영화는 끝났고, 판타지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은 건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갔는데도, 나는 그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거기에는 서슬퍼런 죽음의 그림자가 잔상처럼 남아 검은 극장 안에서 헤매고 있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이 영화에서 환상은 압운이었고, 슬픔은 각운이었다. 순서가 바뀌어도 맞다. 천국에서 시작해 지옥으로 끝나는 노래. 차근차근 한 음 씩 쌓아 올리다가 한순간에 떨어지는 낙차 큰 노래의 소절처럼. 그 지옥 한가운데서 핏발 선 목으로 기어이 부르는 천상의 멜로디와 몸짓. 어둠 속에서 섬약한 빛 하나, 댄서.


영화는 핸드 헬드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가 이미 선언한 ‘도그마 95’(영화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1995년 4인의 덴마크 영화감독이 함께 다짐한 10가지 선언)의 3 계명(‘카메라는 반드시 핸드 헬드여야 한다’)에 기초할 수도 있으나, 이 영화는 그가 ‘도그마 규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평가를 받는 점에서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영화의 핸드 헬드 카메라는 홈비디오의 느낌이다. 화목한 가정을 담은. 아들은 즐겁게 자전거를 타고, 엄마는 아들과 함께 뛰논다. ‘즐거운 우리 집’을 아버지는 흐뭇해하며 카메라로 담아내는, 그런 화평한 가정의 홈비디오.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이 영화는 수많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경찰은 범죄를 저지르고(경찰관 빌은 셀마의 돈을 훔칠 때, 경찰 제복을 입고 있다), 쨍쨍한 빛의 상징인 <사운드 오브 뮤직>의 ‘My Favorite Thing’은 우중충한 죽음에 가까운 레퀴엠으로 불린다. 반대도 있다. 실명에 가까운 셀마는 되려 ‘모든 것’을 보고(‘I’ve Seen It All’),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금방 손이 잘릴 것 같은 위험한 근무 환경에서도 그녀는 리듬과 멜로디를 발견한다. 결정적으로 평화롭고 화목한 홈비디오는 엄마의 죽음을 고스란히 담으며 끝난다.


셀마는 여러 차례 거짓말한다. 아버지를 ‘올드리치 노비’라고 했고,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는 체코에 있는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셀마’라는 이름조차 그녀의 본명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녀의 삶에서 거짓을 하나둘씩 제거하면 딱 한 가지 진실이 남는데, 그건 사랑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바치는. 그래서 셀마에게 자기 존재보다 더 명징한 건 사랑이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사실 환상의 본질은 ‘거짓’이다. 뮤지컬에 비극이 없는 이유는 그게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꿈꾸었던 환상은 전부 가정법으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다. 노래이고 춤이자, 영화며 뮤지컬이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닌) '거짓'이지만, ‘셀마’라는 존재는 (역시 현실이 아닌) 환상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을 통해서 그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셀마는 사랑도 ‘거짓말’의 문법으로 한다. (누명 쓴 자신의 처지가 아들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아들에게 숨긴다) 


하지만 아무리 뽀얀 거짓말로 감추려 한들, 애초에 간절한 진심은 가려질 수 없다. 거짓의 틈새로 비져나온 진심의 조각은 가려진 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렬하다. 그녀의 사랑은 숭고하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숭고한 사랑 자체인 셀마는 ‘메시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십자가를 지려한다. (돈을 빌려달라는 빌에게 ‘월세를 올려드릴까요?’라고 먼저 묻기도 하고, 아들의 눈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 예비된 골고다 언덕(죽음)의 길을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여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랬듯 그녀도 죽음으로써 아들의 구원(눈 수술)을 이뤄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신학적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적극 드러낸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 그 자체인 것처럼. (어떤 쇼트는 거칠게 줌 인 하기도 하고, 어떤 쇼트는 누군가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화목한 가정을 담는 ‘홈비디오’라고 한다면, 촬영하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아버지’다. 그러니까, 이 홈비디오는 ‘아버지’가 찍은 영화다. 엄마의 꿈과 환상, 그리고 사랑과 절규를 모두 따라다니며 지켜본 사람. 셀마의 죽음 이후 카메라는 점점 위로 올라가며 하늘로 상승하는 쇼트는 의미심장하다. 마치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러나 아버지가 그녀의 비극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거대하고 서글픈 비극이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죽음을 앞두고 셀마는 ‘마지막 전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마지막이 아니야. 마지막 전의 노래야” 노래는 끝이 있고, 꿈은 깨기 마련이지만 그녀는 영원한 끝인 죽음을 앞두고 이것이 끝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음 한 음, 그녀의 떨리는 입에서 나온 멜로디는 피가 묻어있었다. 울부짖으며, 그리고 사랑스럽게 읊조리며 모든 힘을 다해 그녀는 노래한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사형이 집행되었고 멜로디는 끊겼다. 그러나 셀마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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