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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Feb 23. 2019

신의 눈을 보려는 자

영화 <사바하>

이 글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신 다음 글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영화 <사바하>


오늘은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말투라도 공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근래 이렇게 둔중한 질문을 날렵한 호흡으로 내뱉는 한국영화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2016년도의 <곡성>, 작년의 <버닝>을 제외하면, 이 영화처럼 다양한 종교적 레퍼런스를 변형해서 내놓은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되었던지요. 아니, 변형만 하지 않습니다. 소화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뱉어냅니다. 미처 삼키지 못해, 여전히 입가에서 서걱이는 모래알 같은 그 질문 말입니다. 


영화는 그 자체로 종교를 혼합해서 축조한 미니 세트장처럼 저는 보입니다. 외관은 사찰 같은 불교식 건축물이지만, 뼈대인 기둥은 기독교적인 고딕 양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처마 끝은 곡선으로 휘어지는데, 창문은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양식이지요. 결정적으로, 그 건물의 꼭대기엔 십자가가 걸려있습니다. 이 건물을 교회라고 해야 할까요, 사찰이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는 이런 식의 ‘혼란’을 주 미스터리로 삼고 팽팽하게 끌고 나갑니다.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신은 누구인지.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영화 <사바하>


사실, 서사를 생각한다면 아쉬운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어쩌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이 드러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습니다. 서사가 설정한 디테일을 스스로 어기는 부분도 있습니다. 다루는 주제가 워낙 무겁다 보니, 가벼움이라는 ‘기능’에만 맞춰진 몇몇 캐릭터의 설정도 아쉽습니다. 맞습니다. 매끈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는 아니지요. 그러나 이런 한계를 하나하나 손꼽더라도, 영화가 뱉어내는 ‘질문’ 그 자체에 저는 매료됐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인 ‘사바하’는 ‘사바 세계’라는 불교 용어입니다. 사바 세계란 참고 견뎌야 하는 세계, 즉 열반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 사는 세계를 일컫는 말이지요. 장재현 감독은 사바 세계가 단지 불교의 세계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담긴 세계가 흡사 현실 세계인 양 놀라운 실감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바하’는 결국 오늘, 우리의 세계를 염두에 둔 제목은 아닐까요.



영화 <사바하>


이야기를 풀어가는 인물은 박 목사(이정재)입니다. 기독교 이단(사이비)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이단(사이비)에 대해서도 그는 조사하지요.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슴 동산’이라는 단체를 고요셉 전도사(이다윗)와 함께 파헤칩니다. 조사하던 중 그 단체의 뿌리는 풍사 김제석이 교주로 있던 동방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김제석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아이를 살해한 네 명의 지국천황(정나한, 김철진, 채태근, 정상범)의 정체를 깨닫습니다. 네 명 중 유일하게 남은 정나한은 금화(이재인)를 죽이려 하는데, 그 검은 계획을 간신히 알게 된 박 목사는 그걸 무마시키려 발버둥 칩니다.


악한 사람이 부처를 만나 중생을 하고, 중생한 사람은 악을 잡는 ‘악귀’가 된다. 동방교의 지국천황 네 명은 이 행적을 고스란히 밟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소년수로 복역하던 그들은, 그곳에서 김제석(부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얻었지요. 그들은 이제, ‘부처’를 위해 악을 잡으러 다니는 악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잡으러 다니는 악이 ‘악’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애초부터 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영화 <사바하>


서사의 면에서 생각해본다면, 단연 풍사 김제석이 새로운 ‘뱀’의 탄생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아이들을 죽인 것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근원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악이란 모호해집니다. 뱀을 품은 ‘그것’이 그들이 말하던 대로 정말 악이었던가요. 또 정나한은 어떤가요. 매일 밤마다 살해당한 아이들의 넋이 찾아올 때, 그리운 엄마의 품 속에 갓난아기처럼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착잡한 기분이 듭니다. “선배, 이건 기독교적 이분법이 아니에요. 불교에서 악은 전부 인간의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해요.”라는 해안 스님(진선규)의 말처럼, 영화는 악과 선을 나누는 명료한 구분선을 지우고, 아예 큰 원 하나를 그립니다. 선과 악을 부분집합으로 끼워넣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라는 큰 원을요.


그러니까, 모든 선과 악은 결국 인간의 욕망과 집착의 하위집합같은 게 아닐까요. 욕망과 집착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이미 성불했으므로 부처가 된 김제석이, 등장인물 중 그 누구보다 욕망을 게걸스럽게 좇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점을 입증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선과 악이란 사실 애초에 없었다는 점을 말하는 영화인 걸까요. (자칭) 선과 (타칭) 악, 둘 모두 죽어버려 앙상한 폐허만이 남은 이 영화의 마지막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 걸까요.



영화 <사바하>


오히려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과 악을 묻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정말 ‘신’을요. 선과 악이 애초부터 없고, 인간의 욕망만이 있다는 점은 매력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그 귀결은 필연적으로 황망합니다. 이 세계뿐만 아니라, ‘나’라는 의미조차 모호해지니까요. 정나한은 그 혼란을 겪는 대표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는 ‘선’이라고 믿었던 부처(김제석)와 자신의 결여를 메워주는(욕망) 새로운 신(‘그것’)을 두고 무엇을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워하지요. “왜 말씀을 안 해주세요, 예전처럼 일어나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 좀 해주세요 아버지”라고 울부짖는 그의 절규는 사실, 선과 악이 사라져 버린 세계에서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겪는 혼란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러 면에서 곱씹을 수 있습니다. 먼저, 성불했으므로 불사의 존재가 된 김제석은 어째서 불에 의해 소멸했던 걸까요. 성불한 부처를 불교에서는 등불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김제석이 불에 탄 것은, ‘더 큰 등불’(그것)에게 삼켜졌던 것이지요. 이건, 그가 탔던 자동차 번호판에서 힌트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자동차 번호판은 ‘OO마 1224’인데, 마태복음 12:24는 의미심장한 구절이지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마태복음 12:24) 그러니까, 귀신은 더 큰 귀신(왕)에게 쫓겨난다는 것이지요.


영화 <사바하>



그렇다면, 김제석을 삼킨 새로운 등불인 ‘그것’은 왜 또 다른 미륵이 되지 않고 죽었을까요. 이건, 그 영화의 날짜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두 신이 죽은 날은 다름 아닌, ‘성탄절’이었습니다. 예수의 탄생이 그 두 신을 몰아낸 것이지요. 생명과 죽음이 이어져있고, 빛과 어둠이 하나라고 말하는 이 영화의 문법을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예수’는 다른 의미에서 뱀을 품은 ‘미륵’이 되려는 존재라고 할까요.


어두운 거리에서 붉은색으로 형형한 십자가, 명멸하는 신호등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캐롤소리, 그리고 하얗게 나부끼는 눈. 결국 영화는 하나님에게 거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정말 살아있는 존재인가요. 계시다면,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계시다면서 우리의 고통을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왜 가만히 내버려두십니까. 그래서 박 목사는 내내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를 되뇔 수밖에 없겠지요.



영화 <사바하>



처음, 염소의 텅 빈 눈망울로 시작했던 영화는 중반에 이르러 겁먹은 사슴의 눈, 두려운 코끼리의 눈을 보여주지요. 그런가 하면, 욕망에 이글거리는 김제석의 눈과 혼란스러운 정나한의 눈을 카메라에 담아내기도 합니다. 내내 수평으로 두리번거렸던 영화는 이제, 고개를 듭니다. 신의 눈을 보려고요. 구원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신은 과연 팔짱을 끼고 있는지, 냉소하는지. ‘당신’은 지금 어떤 낯인지를 질문합니다.


그러니, 당신께 묻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당신 어디에 계신지요. 세계가 엉망으로 되어갈 때, 당신이 아니면 그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요. 왜 귀를 막고 계신가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성글게 내려오는 새하얀 눈송이들 너머로 왜 얼굴을 숨기시나요. 



시편 69:13

13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15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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