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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Aug 12. 2018

어쨌든, 결정해야만 하는 동전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이 글에는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광활한 대지, 황량한 평야. 조금이라도 걸음을 세게 하면 금방 흙먼지로 자욱해져 버릴 것 같은 텍사스의 그 마을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노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의 표현대로 '동기가 없는 살인'이 난무했다. 거기엔 원한도 없다. 구경꾼들은 놀랄 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무력하고, 늙은 보안관은 무기력하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그 나라의 작동방식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2008년 2월 개봉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0주년을 맞아 최근 재개봉했다. 10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이 영화는 비범함 투성이었다. 총이 아니라 공기탱크를 무기로 사용하는 킬러, 살려달라는 피해자에게 결코 윽박지르지 않고 나직이 “Call it”(불러봐)이라고 말하는 킬러, 상대에게 죽일지 말지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겠다는 그의 대사는 비범함의 결정적. ("동전으로 결정 못해요"라는 피해자에게 안톤 쉬거는 "동전도 내 마음과 같을 걸"이라고 말한다) 끔찍한 악마의 디테일로 가득 찬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어떤 의미로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문장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텍사스의 드넓은 사막에 캐릭터를 풀어두었다가 갈등이 진행되면서 점점 모텔이라는 비좁은 공간으로 캐릭터들을 모으는 연출 역시 흥미롭다. 처음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르웰린(조슈 브롤린)은 시체더미와 돈가방을 발견한다. 돈가방을 챙긴 르웰린은 아내와 함께 도망가고, 그 뒤를 킬러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쫓는다. 뒤늦게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가 둘의 뒤를 따른다. 이 셋은 각자 "돈가방-살인(킬러)-체포(형사)"라는 연결고리로 묶였지만, 영화는 이 셋을 같은 공간에 함께 두면서, 단 한 번도 같은 쇼트에 동시에 담지 않는다. 셋의 꼬리잡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이 싸움의 생존자와 패배자가 누가 될 것 인지를 숨죽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따르는 룰 때문에 그렇게 됐다면, 그딴 룰을 그럼 어디다 쓸까?"라고 말하는 안톤 쉬거는 그 자체로 모든 룰을 거부하는 무규범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에게 살인은 복수가 아니다. 정의구현 역시 아니다. 메세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동전 던지기로 살인을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살인이란 그에게 지극히 (목적 없는) 유희적인 행동이다. 그의 타겟 역시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우연한 상황이자, 그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뿐. 그의 타겟이 되는 사람은 시쳇말로 재수 없게 걸린 것뿐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쩌면, 이 영화의 작동방식 자체가 안톤 쉬거적인 특성(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까. 사실 영화의 처음, 사막에서 사냥하던 르웰린은 우연히 시체더미를 발견했다. 200만 달러의 돈가방 역시 우연히 주웠다. 안톤 쉬거와 격렬한 총싸움 후 르웰린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칼슨 웰스(우디 해럴슨)는 어떻게 알고 거기로 온 걸까. 또 안톤 쉬거는 어떻게 칼슨 웰스의 숙소를 알아낸 걸까. 어떤 의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적인 요소가 가득한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세계의 작동원리 자체가 ‘우연’이라는 비논리적, 비합리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최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 아닐까.


도망치는 르웰린과 뒤쫓는 안톤 쉬거. 이 두 명이 각각의 대립항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 대립구도는 지워진다. 결국 안톤 쉬거와 대립하는 쪽은 르웰린이 아니라 보안관 에드다. 왜 르웰린이 아니라 에드일까. 에드는 오랫동안 보안관을 해옴으로써 쌓아온 경험과 관록이 있다. 그러나 영화 내내 보안관 에드는 사건 현장에 늘 뒤늦고, 또 무기력하다. 그는 "내가 쫓는 실체가 유령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라고 자신의 인식의 한계와 무력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우연 앞에서 경험과 합리는 아무 의미 없는게 당연하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쩌면, 에드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파악해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인간 일반의 모습 같은 게 아닐까. 그는 지난밤에 꿨던 비루한 꿈만을 되뇔 뿐, 이 세상에 대해 어떤 해석도, 설명도 하지 못한다.


삶에서 우연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고통은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다. 시험 역시 아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성장할 것도, 어떤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꾼 꿈처럼 '실체없는 연기같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물음에 영화는 답을 하지 않기에 무심하고, 또 그래서 지독하게도 서늘하다. 망설이는 피해자에게 안톤 쉬거는 동전의 앞뒷면을 얼른 결정하라고 재촉한다. “Call It”. 결과가 무엇이든, 어쨌든 우리는 동전의 한 면을 결정해야 한다. 

자, 당신은 어떤 답을 내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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