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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Sep 06. 2018

집단의 광기와 생각하는 손

영화 <소셜포비아>

* 이 글에는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사람을 해치는 것은 뾰족한 칼이 아니라, 표독한 말이다. 정의의 부재가 아니라, (편향된) 정의의 부조리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집단의 광기다. 하얀 이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웃는 집단의 웃음은 선득하기까지 하다. 그 세계의 하늘은 푸르지 않고, 희부윰한 잿빛이었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소재 면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서치>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SNS 매체를 활용한 극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다. 두 영화는 단순히 SNS라는 소재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SNS를 어떻게 활용하고, 소비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지점까지 두 영화는 건드린다. SNS를 통해 만인과 연결되어 있는 지금, 어떤 사람은 ‘연결됨’으로 풍요를 누리지만, 또 어떤 사람은 ‘연결됨’ 그 자체로 오히려 소외를 당할 수도 있다는 역설. 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사리사욕과 이권으로 얽혀있다는 탄식. 영화 <서치>에서 딸의 실종이 누군가에게는 인기를 얻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장면은 영화 <소셜포비아>에서 레나의 죽음을 생중계하는 양게 TV와 그걸 흥미진진하게 보는 익명의 사람들을 다루는 장면과 분명 맞닿아있다. 


사실, 영화 <소셜포비아>는 만듦새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초반 의미심장하게 던져두었던 어떤 장치는 끝내 거두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초반부터 있는 힘껏 한가운데로 잡아두었던 구심력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 힘이 옅어진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단점을 덮을 만큼 그 매력이 넘치는 것도 있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그 자체의 영화적 매력으로 자신의 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만든다.



영화 <소셜포비아>



영화 <소셜포비아>의 매력은 무엇일까. 배우들의 호연은 말할 것 없이 훌륭하다. 각자 맡은 캐릭터는 자신이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주승 배우와 변요한 배우다. 이 둘은 자신의 캐릭터 진폭을 폭넓게 드러낸다. 나머지 조연 역시도 훌륭하다. 어느 한 캐릭터도 튀지 않고 작품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또한, 영화 내에서 소도구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종종 누군가가 살인범으로 몰릴 때마다, 이른바 ‘매장’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 활용되는 수단은 두 가지다. 온라인에서는 트위터로, 오프라인에서는 포스트잇이다. 사실 쉽게 붙였다 떼었다, 편리하게 사용하는 포스트잇은 트위터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가. 글은 짧고, 간단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시켜준다. 또한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삭제 버튼을 누르거나, 손으로 떼어내기만 하면 끝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공격수단으로 변하는 순간, 어느 무기보다 공격적이고 날카롭고 둔중하다. 한편 레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 자신의 목을 감는 도구가 ‘인터넷 랜선’이라는 설정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사람을 구석으로 몰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칼이 아니라 글이고, 익명으로 연결된 온라인 인간관계다.



영화 <소셜포비아>



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정의가 등장한다. 주인공 지웅의 트위터 계정은 “Justice”고, 그가 경찰이 되고자 하는 동기 역시 사회가 보다 정의로웠으면 하는 소망에서였다. 역시, 민하영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모인 집단의 동기도 ‘정의를 세우자’는 기치 아래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정의를 세우고자 행했던 ‘신상 털기’, ‘현피’, ‘매장’ 같은 것은 대체 정의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는 행동이다. 정의가 익명에 숨어 집단이 되는 순간, 그건 어느새 광기가 된다. 집단의 광기는 소수자의 완전한 파멸과 나락을 제물로 얻어야만 포만감에 느긋해지는 법일까. 민하영의 시체를 앞에 두고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트위터를 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용민을 향해 하얗게 웃는 그 집단의 웃음은 얼마나 선득하며, 또 얼마나 소름 끼치는가. 다른 사람의 정의롭지 않은 모습을 비난하며, 공격하는 것 이면에 일렁이는 것은 종종 자신의 비릿한 우월감이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샤덴 Shaden’(고통)과 ‘프로이데 Freude’(기쁨)이라는 상반된 두 의미가 연결된 이 단어는 번역하자면, 타인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이라는 감정이다. 타인에게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편견과 동시에 내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는 감정.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느낄 수 있는 감정 중에 가장 끔찍한 감정이 아닐까. 



영화 <소셜포비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관객들은 러닝타임 내내 숨죽였던 핸드폰의 전원을 켠다. 그와 함께 저마다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며 핸드폰을 건드린다. 역시 손가락으로 이 글을 쓴 나는, 또 손가락을 움직여 이 글을 보는 익명의 우리는, 각자의 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결국 수없이 복잡한 연결로 이루어진 SNS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생각이자 연민이고, 그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손으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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