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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Sep 29. 2018

나의 또다른 얼굴

영화 <에브리데이>

‘나’라는 고유의 존재는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이 점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의 옛말은 얼골입니다.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얼굴에는 자연히 그 사람의 ‘얼’이 배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 신영복, "담론", <비극미>, 254.


신영복 선생의 글에 의하면, ‘영혼의 모습’이라고도 불리는 얼굴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부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작가 한강은 2000년 초에 내놓은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중 <아홉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아홉개의 이야기 - 어깨뼈>, 251.


지극히 당연하게도, 영혼을 드러내는 인간의 신체가 얼굴인지 어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글은 다른 언어로 같은 의미를 썼다. 인간의 신체는 단지 껍데기가 아니라는 것. 사람은 내부의 무수한 혈관과 장기, 탄탄한 뼈, 그리고 헐떡이는 심장을 희끗한 피부로 깔끔하게 봉합해버린 것 따위가 아니라는 것. 인간이란, 육체만으로도, 영혼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고결한 그 어떤 것.



영화 <에브리데이>


영화 <에브리데이>에서는 신체를 가지지 못한 한 자아 A가 등장한다. 그는 다른 이의 신체에서 매일 아침 태어나, 그곳에서 매일 밤 죽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 날 아침이면 멀쩡하게 또 다른 이의 몸에서 태어나 삶을 시작한다. (영화 내용상으로 ‘죽는다’라기보다, 그, 육체의 주인인 자아에게 ‘밀려난다’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그런 그에게도 규칙이 있다. 내 것이 아니므로, 속으로 들어간 그 사람의 인생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 최대한 그 사람의 삶의 루틴을 유지해줄 것. 영화 <에브리데이>는 러닝타임 내내 이 흥미로운 설정을 시종 유쾌한 분위기로 지탱해 나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자아 A가 매일 몸이 바뀌는 설정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리아넌(앵거리 라이스)의 남자친구인 저스틴(저스티스 스미스)으로 깨어났던 A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일이 이럴 수 없는 것은 알지?” (리아넌은 저스틴의 무관심에 지쳐있다가, 그날은 저스틴의 친철한 모습에 행복했던 날이다) 그때, 리아넌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지. 내일은 내일이야” 오늘 일은 오늘에 묻혀두고, 내일 일어나면 기꺼이 ‘내일’ 일어날 일을 새롭게 맞이하겠다는 의연한 다짐. 리아넌의 입을 빌려 영화 <에브리데이>는 하루의 귀중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에브리데이>


사실, ‘하루’마다 다른 이의 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자아 A라는 설정 자체야말로 주제의식을 명료히 강조한 것이다. 삶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하루에도 일어나는 법. 그러니까, 유한한 인간이 거대한 삶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작은 하루에 주목해야 한다. 그 작은 하루가 모여, 쌓여, 결국 삶이 되는 것이니. 과감히 학교 수업을 빼고, 놀러 간 저스틴과 리아넌은 포춘쿠키에서 나온 글귀(‘당신은 멋진 미소를 가졌어요’)를 보고 이렇게 대화한다. “이건 (미래를 알려주는) 점이 아니야. 점은 미래형이어야지.” “아니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 것이지” 적어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일의 요행이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여기’이자, 내가 살아가는 일상,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소중한 것이다.


리아넌의 아버지가 얼굴 그림을 즐겨 그린다는 설정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리아넌의 아버지는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극사실주의적이지 않다. 그가 그린 얼굴은 얼굴답지 않은 얼굴 그림이다. 얼굴의 형태가 불분명하고, 윤곽이 흐릿하며, 피부 색채 역시 원색적이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엇을 발견했던 걸까. 그리고, 왜 관객은 그가 그린 그림이 그 어떤 사진보다 더욱 진실한 얼굴에 가깝다고 느끼는 걸까.


영화 <에브리데이>


자아 A는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갔을 때, 꼭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 계정에 업로드하며 기록을 보관한다. 이 장면이 리아넌의 아버지가 얼굴만을 그리는 점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약인 걸까. 물론 그는 자신의 흔적을 기록하고 싶다는 사소한 버릇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설정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건, 얼굴이 사람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인간의 고결하고 희끗한 그 내면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 누구나 알 수 있게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당신은 고결한 내면을 지금, 아름답게 가꾸고 계시냐는 것.


‘당신은 좋은 미소를 갖고 있어요.’ 마지막, 영화는 다시 관객에게 따스한 말을 건넨다. 혹시라도 우리가 잊고 지냈을까 봐.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까 봐. 그렇게 강조하는데, 나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영화 <에브리데이>는 나의 또다른 얼굴이었다.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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