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작지만 아주 큰 영향
친구들과 같이 심야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가 주었던 감동에 푹 빠져 있습니다. 쉽사리 빠져나오기가 힘들죠. 그래서 흔히 우리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가는 길에서 이러쿵저러쿵 소감을 서로 이야기하죠.
제가 군대 휴가 나왔을 때 친한 친구랑 같이 '곡성'이란 영화를 밤에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밖으로 나가는 길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했습니다. "실망했다." "별로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고 그냥 무서운 영화였다." 등 다들 영화가 별로였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죠. 그러나 저와 제 친구는 감동의 눈빛과 함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죠. 그 감동의 눈빛은 영화를 향한 것이었고, 그 어이없다는 표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에 향한 것이었죠. 물론 제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죠. 하지만 영화를 이해하지 못해도 모두가 맞아떨어지는 그 한 부분이 있습니다. 명대사죠.
"뭣이 중헌디?!"
"와타시가 아쿠마다!!!"
"미끼를 확 물 어분 것이여!"
이렇게 우리는 영화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들을 재미 삼아 따라 하곤 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나면서 동시에 궁금해지기 시작하죠. 왜 따라 하고 있는 걸까? 그런 반응들은 왜 일어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읽었던 책 <씨네샹떼>. 그 책의 서문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삶에는 기승전결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건 예술에서나 가능할 뿐. 정확히 말해 삶에 기승전결이 없으니, 그걸 만들려고 하는 절실한 노력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만큼 우리에게 기승전결의 감각을 잘 가르쳐 주는 매체도 없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찔한 영상과 음향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발전하고 이렇게 변하고,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고.
이렇게 만남을 시작해서 그렇게 연애를 하고 어떤 커플이 되어 백년해로를 꿈꾼다고. 흔히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다고들 말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삶은 배운다.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멋진 방법에서 루저로 견기는 법까지, 키스하는 방법부터 사랑을 나누는 법까지, 다가가는 기술에서부터 헤어지는 방법까지, 커피를 마시는 방법에서 소주와 와인을 폭음하는 것까지. 배움은 넘쳐 난다. 음악을 듣는 방법, 산책하는 방법, 자본에 굴하지 않는 방법, 권력에 맞서는 방법... 그 모든 것을 모아 우리는 '영화'라고 부른다.
맞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존재할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와 같은 삶을 마음 한 편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 그 영화에서 주는 감동을 내 삶에 가져가고 싶기 때문에 명대사를 따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요? 다시 한번 <씨네샹떼>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죠.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영화의 본질 중 하나로 제스처를 꼽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벌거벗은 생명, 즉 '누다비타(La Nuda Vita)'의 본질을 영화와 맞물려 설명하려고 한 것도 있지만, 제스처야말로 영화의 시작이었고 과정이었으며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톰과 제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이리스로 처리된 동그란 클로즈업 속에 제리가 보내는 위크는 이야기가 끝났음을 대변한다. 제스처는 그 자체로 알파(Α)이자 오메가(Ω)인 셈이다.
이 제스처에는 비극적 제스처가 있을 수 있고, 희극적 제스처가 있을 수도 있다. 달콤 쌉싸름한 희비극적 제스처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영화 속 주인공들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는 모두 이것들 가운데 하나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아! 저렇게 프러포즈를 하면 내 마음이 잘 전달되겠구나.'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나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 등등. 그래서 영화는 자동적으로 거울이 된다. 캐릭터들의 제스처를 통해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를 통한 성찰이다. 놀라운 건 반성과 성찰의 주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에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진정한 이유다.
영화 '쿵푸팬더'를 재밌게 보고 난 후 친구끼리 ↑ 이런 장난을 칩니다. 그리고는 친구는 엄청 놀라면서 두려움을 떠는 모습을 연기하죠. 다른 영화에서도 이런 제스처들이 나타납니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연필 끝을 깨무는 버릇. 곤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특이한 버릇. 좋은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혼자 즐거워하는 모습. 이렇듯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은, 영화에서 나오는 작은 모습들을 따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맞습니다.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죠. 남의 것들 따라 하는 것이죠. 남을 따라 하는 순간, 스스로가 스스로일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내가 내가 아니면 나는 헛된 삶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삶을 내가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어쩌면 영화에서 나오는 것들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세뇌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쿵푸팬더'처럼 손가락 권법을 따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순수해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죠. 영화를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떠나 그 주인공에게 이입되어버리죠. 물론 좋은 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은 없을 순 없는 법이죠.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자꾸 흉내 낼수록 우리는 성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어리석은 꼬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영화가 성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니, 성찰적 힘이 없는 영화는 가짜 영화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성찰이든, 아니면 미적이거나 사회적 상찰이든 간에 말이다. 영화가 가진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영화평론가와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철학자가 만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철학자를 통해 성찰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고, 영화 평론가를 통해 영화 매체의 가능성을 명료화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 철학자가 영화평론가가 되고, 영화평론가가 철학자가 되는 걸 꿈꾼다. 스크린 이미지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하나의 프로젝션을 통해 투사하는 것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영화관은 거대한 자궁이고, 영화는 모든 것을 융합시키는 거대한 영광로와 같은 장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