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끼니를 때울 때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라면은 절대 빠질 수가 없죠. 끓일 때 김치를 같이 넣을 때도 있고 달걀을 같이 넣을 때도 있죠. 면을 다 먹고 밥을 말아먹을 때도 있죠. 이 모든 것은 편의를 위해 모조리 섞어 먹는 거죠. 그 이유는 굳이 설거지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설거지가 귀찮고 배는 고프니까,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먹는 것은 사료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식사란 무엇일까요? 자기가 사는 집에 손님이 놀러 왔을 때는 다른 모습이 보이게 되죠. 라면을 끓여서 라면 그릇에 담고, 김치와 밥은 따로 그릇에 담아 정성스럽게 밥을 차리게 되죠. 라면이 잘 익었나 안 익었나 손님이 먹는 걸 보게 되죠. 그다음에 자신도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배고파서 먹은 것이 아니라 손님과 수다를 나누다 보면 먹고 있는 그 모습이 식사인 것이죠.
의무감으로 먹는 건 사료가 되죠. 힘들까 봐 먹어두는 것. 끼니를 때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것. 전부 사료가 되는 것이죠. 혼자서 식사를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마련이죠. 반대로 혼자 먹는데도 잘 차려서 먹는 사람들도 있죠. 한 끼를 먹을 때도 제대로 차려 먹는 거죠. 김치는 김치 그릇에. 멸치볶음은 다른 그릇에. 국은 국그릇에. 밥은 밥공기에. 이렇게 식사를 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 필요가 없어지죠. 그 이유는 사료를 이미 먹고 있기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혼자 먹을 때도 행복하게 먹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식사와 사료를 구분할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죠. 그래서 혼자서 식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타인과 만나서 식사를 할 가능성이 많아지죠. 반대로 혼자서 사료를 먹는 사람들은 타인과 만나서 밥을 먹을 때도 사료를 먹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죠.
아까 손님이 왔을 때 우리가 했던 모습들은 우리가 불편함을 감내하고 대접했던 모습이죠. 즉, 누군가를 아끼게 되면 불편함을 감내하게 되죠. 우리는 불편함이 싫어서 다 말아먹는 것이죠. 누군가를 위해 불편함도 감수하는 것이 식사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불편함을 덜기 위해 식당을 찾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고급 사료이죠. 그러면 어쩌라는 걸까요?
발터 벤야민 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이 말하길, 식사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의 동의어다.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을 때, 어머니께서 다 차려주시고 나서 어떻게 하시나요? 다른 데 가시나요? 아니죠, 앞에 계시죠. 제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죠.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죠. 그래서 어쩌면 자식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럴 때 생겨진 말인지도 모르죠. 그렇기에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라는 뜻이 되겠죠. 그렇다면 어머니와 자신이 같이 밥을 먹다가 자신이 먼저 다 먹으면 어떻게 하시나요? 만약 밥을 먹고 떠난다면, 어머니는 사료를 먹는 느낌을 받게 되겠죠. 정말 사랑한다면, 밥을 먹을 땐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켜주는 것.
기본적으로 우리가 먹는 것들은 거의 다 사료이죠. 그런데 저런 관계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식사할 수 있는 관계. 그래서 나중에 나이가 들면 같이 밥 먹을 친구가 필요해지는 것이죠. 태어나서 식사를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엄청 많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사료를 너무 많이 먹어 왔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사료를 먹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식사를 먹으려고 할 것이며, 매일 한 끼에는 가장 좋은 사람과 있으려고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