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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02. 2019

행복은 언제 가능한가? [에피쿠로스학파]

"당신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배려하라!"


에피쿠로스 Epicurus (BC341~BC270)

에피쿠로스 Epicurus (BC341~BC270)와 루크레티우스로 대표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Hedonism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같은 전체 공동체를 중시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은 개체의 쾌락을 긍장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입장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저주하곤 했다. 물론 여기에는 숨겨진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쾌락은 오직 통치자나 통치 계층에게만 독점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입장에서 대다수 피통치자들이 모두 쾌락을 향유한다는 건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의 독점, 이것이 억압적 사회의 한 가지 특징 아닌가. 어쨌든 주류 철학자들의 저주와는 달리 사실 에피쿠로스학파는 개체의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헤도네 Hedone'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은 오늘날 성급하게 '육체적 쾌락'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이 기쁨이나 유쾌함을 느끼는 모든 체험, 그러니까 육체적 쾌락뿐만 아니라 정신적 쾌락까지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가진다. 어쨌든 헤도네, 즉 쾌락을 강조했다는 것이 논점은 아닐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비난받았던 이유는 이 학파가 일부 통치자가 독점하고 있었던 쾌락을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하라고, 심지어 허용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쾌락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교외에 정원을 사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정원은 '에피쿠로스의 정원 The Garden of Epicurus'이라고 불렸으며, 이곳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하고 유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에 동의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에피쿠로스학파가 개인적인 쾌락에 매몰되어 있다는 저주가 이 대복에서 허구임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에피쿠로스의 정원에는 여자들이나 노예들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심과 주변, 혹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위 구조를 가진 기존 공동체들이 에피쿠로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저주했던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심지어 그들의 눈에는 창녀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신 교환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친절하게 대우해주었던 에피쿠로스가 음란하고 저급한 인물로까지 비쳤다. 독립된 자유로운 개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관계에 대해 혐오감 내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전체의 권위를 중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것이다.


사실 에피쿠로스학파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서 모욕에 가까운 저주를 받았던 데에는 이것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플라톤으로 상징되는 주류 서양철학 전통의 근본 전제들을 강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에피쿠로스학파가 공유하고 있던 육체에 대한 특이한 입장이다. 자유로운 공동체에 대한 해묵은 질시 때문이었는지 사실 에피쿠로스학파의 저작들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작은 단편 들일 망정 로마 바티칸 비밀서고 금서로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외에 가장 자세한 저서가 금서로 지정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바로 루크레티우스가 지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이 금서로 정해지지 않았던 것은 루크레티우스가 ≪아이네이스 Aeneis≫라는 대서사시로 유명한 버질 Virgil, 즉 베르길리우스 Publius Vergilius Maro (BC70~BC19)라는 문학자와 함께 로마제국 시대를 양분했을 정도로 유명한 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루크레티우스의 이 중요한 책을 통해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들어 있는 한 대목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음이 신체와 더불어 생겨나며 신체와 함께 성장하고 신체와 함께 늙어감을 우리는 지각한다. 부드럽고 연약한 신체를 가진 어린아이가 걷듯이, 그들의 판단력도 미약하다. 성숙해져서 힘이 강해질 때, 그들의 판단도 나아지고 그들의 마음의 힘도 강해진다. 나중에 거친 세월의 힘이 그들의 신체를 공격하고, 수족이 무디어져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후에, 지력이 떨어지고 혀가 헛돌아가며,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이 약해지고 스러진다.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실체는 모두 연기처럼 공기 중의 높은 미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방금 읽은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루크레티우스가 마음과 육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 즉 평행론 parallelism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육체의 역량과 마음의 역량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라 비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마음이 신체와 더불어 생겨나며 신체와 함께 성장하고 신체와 함께 늙어간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만큼 에피쿠로스학파가 플라톤의 철학이나 후대의 기독교 사유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에서는 마음과 신체가 대립적인 것으로, 동시에 마음은 신체와는 달리 불멸성을 갖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이런 주류 전통의 입장에서 볼 때 영혼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입장은 이단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생명력이 있는 실체는 모든 연기처럼 공이 중의 높은 미품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평행론을 살펴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이 학파가 왜 에픽테토스 Epictetus (50?~138?) 같은 스토아 철학자에게 "방탕하다"라고 비판받았는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사실 에픽테토스는 육체적 쾌감이 정신적 쾌감과 함께 우리 실존의 쾌감을 드러내는 2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쾌락을 중시했던 에피쿠로스학파가 기본적으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직접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했던 쾌락주의의 전모를 살펴보면,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오해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 Menoikea라는 젊은이에게 바람직한 삶에 대해 조언하면서 보낸 서신 가운데 일부이다.


쾌락이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자 끝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락이 원초적이고 타고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쾌락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 …… 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Epistolē pros Menoikea≫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인간은 쾌락의 존재였다. 인간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하고 쾌락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의 자연주의적 사유 전통이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이 기쁨을 지키려고 하고 슬픔을 제거하려고 하는 삶의 힘, 즉 코나투스에 놓여 있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또한 프로이트도 인간의 행동이 쾌락을 지향하고 불쾌를 피하는 쾌락 원리 Lustprinzip에 의해 지배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들의 관점에 앞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제1원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죽음마저도 쾌락 원리에 의해 선택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따르면 "죽음은 근심 걱정에 빠진 사람을 제거해서, 더 많은 불행을 더 겪을 수도 있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잠시 죽음에 대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이 압도적인 자연이나 사회체제에 저할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이나 노화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을 자살로 저항할 수 있고, 체제의 억압이나 수탈도 자살로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노예로 부리려고 했는데, 노예가 자살하면 주인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아직도 체제에서 자살을 금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억압받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수동적인 저항이지만, 억압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찌할 수 없이 무서운 자항이 바로 개체의 자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가장 불쾌한 상태는 죽지도 못하고 노예처럼 부려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비슷하게 쾌락주의를 표방하며 중국 전국시대 戰國時代를 풍미했던 양주도 마찬가지의 입장이었다. 그의 입장은 양주학파의 사상가로 보이는 자화자 子華子라는 인물의 글로 ≪여씨춘추 呂氏春秋≫에 전해지고 있다.


온전한 삶 全生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 虧生이 둘째이며, 죽음死이 그다음이고, 핍박받는 삶迫生이 제일 못하다. 존중받는 삶은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온전한 삶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모두 적절함을 얻은 것이다. 부족한 삶은 그 적절함을 부분적으로만 얻은 것이다. 부족한 삶은 옅게 존중받는 삶이다. 부족함이 심하면 그만큼 더 존중 받음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지각 능력을 잃고 삶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ㅁ라한다. 핍박받는 삶이란 인간의 욕망이 그 적절함을 얻지 못하고, 최악으로 불쾌한 상태에 있다는 걸 말한다. 굴종이 그렇고 치욕이 또한 그렇다. 그래서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라고 한 것이다.
≪여씨춘추 呂氏春秋≫, <귀생 貴生>


에피쿠로스학파든 양주학파이든 개인의 쾌락을 중시하는 쾌락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모두 굴종과 치욕이다. 굴종과 치욕의 상태, 그것은 노예의 상태이자 부자유의 상태다. 결국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최고로 불쾌한 상태는 죽음이 아니고 부자유의 상태였던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정신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체제 입장에서는 정말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얼마나 혁명적인 생각인가. 그래서 체제는 에피쿠로스학파를 동물적인 쾌락이나 추구하고 있다고 저주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체제에 순응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걸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개인주의자들, 혹은 쾌락주의자들을 어떻게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억압적 권력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최종적 무기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니 말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죽음을 긍정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억압받는 삶이 더 불쾌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억압받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런 방법이 없다고 잘못 인식하고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사유와 선택을 그리 강조했던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가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이 아니었고,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름진 음식이나 맛있는 술, 혹은 성적인 대상은 순간적으로 쾌락을 주지만 , 이것들은 인간 자체를 약하게 만들고 더 이상 쾌락을 누릴 수 없는 존재로까지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반면 입에 너무 쓴 약이나 괴로움의 감정을 가져다주는 고된 운동은 순간적으로는 불쾌감을 주지만, 이런 것들은 인간 자체를 더 강하게 만들어 더 큰 쾌락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공허한 추측들"을 우리의 정신에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혼란된 생각들은 우리 삶에 진정한 쾌락을 주는 것들에 대해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제 에피쿠로스학파가 육체적 향락에만 빠져 있다는 당시 세간의 오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지적인 통찰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생각에서 발생하는 쓸데없는 욕망을 부정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체제의 억압이 작동하는 정치적 활동을 멀리하면서 자신만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도체는 명예나 부 혹은 권력을 대가로 인간들로 하여금 상호 파괴 혹은 상호 갈등의 관계에 빠지도록 유인하곤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양주의 쾌락주의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맹자≫ <진심盡心> 상편을 읽어보면, "양주는 '위아爲我'를 주장하면서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았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양주는 각자가 자신의 삶을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간주할 때에만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동양의 양주라는 인물과 서양의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가 매우 유사한 논리로 정치적 욕망의 세계를 강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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