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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05. 2019

행복은 언제 가능한가? [스토아학파]

"전체와의 조화를 도모하라!"

에피쿠로스학파의 탁월한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우발성의 우주론을 주장했을 때, 사실 그는 인간의 삶과 행복에도 우발성의 관념을 도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우주의 탄생은 평행으로 내려오는 원자들 가운데 어떤 하나에 클리나멘,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작은 기울어짐이 발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떤 외부 존재와 우발적으로 마주쳤을 때에만 쾌감이나 불쾌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오늘은 불쾌하지만 내일은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학파가 공유했던 중요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헬레니즘 철학을 양분했던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폰 아르님 Hans Friedrich August von Arnim (1859~1931)은 초기 스토아학파의 어록을 네 권의 책으로 묶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진진한 구절이 등장한다.


폰 아르님 Hans Friedrich August von Arnim (1859~1931)
모든 원인의 결과를 지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면, 어떤 것도 그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미래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일어날 모두를 분명히 파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 시간의 경과는 줄을 다시 푸는 것과 같으며,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는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의 단편 Stoicorum Veterum Fragmenta≫


돌돌 말린 실패를 연상해보라. 스토아학파는 세계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마치 실패에서 실을 푸는 과정과 같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실을 완전히 풀면 우리는 실 중간 부분에 노랗게 염색된 부분이 있다는 것, 혹은 전체 실의 길이가 얼마 안 된다는 것 등을 모두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실을 완전히 풀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은 이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핵심 견해였다. 스토아학파는 세계가 철저한 인과관계 혹은 인과적 질서에 의해 발생하고 움직인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원인을 알게 되면 결국 이 원인에 따른 결과 역시 미리 다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정론에서 가장 멀리 벗어났던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이처럼 완전한 결정론을 믿고 있었던 셈이다. 거의 뉴턴이 주장했던 기계론적 결정론의 선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결정론적 세계관은 ≪신본성론 De natura deorum≫에 나타난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의 다음과 같은 발언, 즉 "우주의 본성은 자발적 운동과 노력, 그리고 욕구를 지닌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전체 우주가 자신만의 고유한 질서 혹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이러한 전체 질서를 잘 파악해서 그것에 일치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전체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키케로가 다음과 같은 행위 원칙을 제안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자연과 조화되거나 아니면 자연과 조화되는 그런 사태를 일으키는 것에 가치가 있다. 따라서 충분히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요소가 그것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선택될 가치가 있는 반면, 그런 것의 반대는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일치되는 것을 그 자체를 위해 획득해야 하며, 그와 반대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 원리로 입증했다. 생물의 본성에 따르면 첫째 기능은 자신을 자연적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 기능은 그것이 자연과 조화되는 것을 붙잡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없애버리는 기능이다.
≪최고선과 최고악에 관하여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우주라는 커다란 실패에서 풀어져 나오는 실의 작은 마디들에 불과한 우리는 전체 실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체 자연과 조회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조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전체 자연과 대립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 부분으로서 우리의 그런 행동은 결정되어 있는 세계 전체의 인과적 질서를 동요시키게 도리 것이고, 그 결과 우리 자신에게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 전체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최종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일원이자 동시에 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
≪명상록 Imperium Romanum≫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입장을 상징하는 아파테이아 apatheia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삶에 대한 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 상태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곧 아파테이아 상태이다. 아파테이아는 글자 그래도 '파토스 pathos'가 '부재한 a' 상태, 즉 일체의 인간적 감정에서 초연한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불리한 일이 생기더라도 스토아학파는 결코 그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에게 행운이 닥쳐와도 함부로 쾌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전체 세계가 필연적으로 자신을 전개해가는 과정, 즉 운명 factum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행이든 행운이든 그것이 결국 필연적인 전체 질서에 따라 벌어진 일이라면, 우리는 이에 대해 분노하거나 쾌락을 느끼는 감정 상태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이토록 삶에 초연했던 스토아학파의 기본 정신은 크리시포스 Chrysippos (BC280?~BC207?)라는 철학자의 다음 말에도 잘 요약되어 있다.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이는 ≪초기 스토아 철학자의 단편≫에 실려 있는 말이다.


삶에 대해 초연했던 스토아학파의 태도는 여러 면에서 전통 동아시아인들, 특히 유학자들이 보여왔던 삶의 태도와 유사하다. 중국 신유학 新儒學을 대표하는 철학자 소웅 邵雍 (1011~1077)의 다음 이야기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는 것 같아 경이롭기까지 하다.


크고 작은 일에는 모든 자연天과 사람人을 지배하는 이理가 갖추어져 있다. 몸을 닦아 기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며, 그가 행운을 누리고 불행을 겪는 것은 자연에 달려 있다. 행운을 얻든 잃든 간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거서이 자연 복종하는 길이다. 그러나 도리가 아닌 험악한 일을 하면서 오히려 요행을 바라는 것은 자연을 거역하는 일이다.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지만, 그것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자연에 달려 있다. 얻든 얻지 못하든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길이다. 억지로 취하고 반드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는 것이다. 자연을 거역한 사람은 반드시 근심과 재난을 당할 것이다.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


전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야만 하고, 따라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혹은 유리하게 펼쳐지는 자연 질서에 대해 부동심을 가져야 한다는 소옹의 주장을 들었다면, 아마 스토아학파의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신유학이 아니더라도 동아시아에서 사실 스토아적 사유가 하나의 생활철학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인사 盡人事, 대천명 待天命' 이란 유명한 구절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모두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말은 남송 南宋의 유학자 호인 胡寅 (1098~1156)이 자신의 저서 ≪독사관견 讀史管見≫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제갈량 諸葛亮 (181~234)의 말, 즉 "사람의 일을 닦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수인사 대천명 修人事待天命'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으로 나타나든 혹은 행운으로 나타나든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나 유학의 선비들이 거의 동일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채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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