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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07. 2019

행복은 언제 가능한가? <고찰>

서양철학의 과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통일

헬레니즘 철학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로 양분된다. 에피쿠로스학파개체의 삶과 개체의 쾌락을 중시한다. 그래서 전체 질서가 자신의 삶을 몹시 불쾌하게 만든다면, 개체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전체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쾌락을 줄테니까. 반면 스토아학파개체의 삶보다는 전체 질서를 더 중시한다. 그들은 전체 질서가 만약 개체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면 개체의 쾌락을 강조하는 에피쿠로스의 사유 전통이나 전체의 필연적 질서를 중시한 스토아학파의 사유는 스피노자에게서 비판적으로 종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

우리는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에서 스토아학파의 냄새가 나는 주장뿐만 아니라 에피쿠로스학파의 속내를 반영하는 주장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주장으로 "사물의 본성에는 우연적인 것이란 전혀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면 작용을 미치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명제를 들 수 있다. 한편 후자를 대표하는 주장으로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생각하고자 한다"는 명제를 생각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을 현대에 다시 살려낸 들뢰즈의 탁월함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에티카≫에 나타난 이런 두 가지 흐름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대담 1971~1990 Pourparlers 1972-1990≫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에티카≫는 정의, 명제, 논증, 귀결 등의 연속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속에는 개념의 놀라운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웅장하고 잔잔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저항할 수 없는 강물과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주석이란 이름 아래 '작은 사건들'이 불연속적으로, 독자적으로, 여기저기 솟아나 서로 부딪치면서, …… 모든 정열들을 폭발시켜 슬픔과 기쁨의 전쟁터를 이루고 있다."


들뢰즈의 탁월함이 번뜩이는 부분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속내를 꿰뚫어 보면서, 연속적 흐름을 중시했던 스토아학파의 정신 그리고 우발적 사건들의 불연속성을 강조했던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신을 모두 드러내 보였으니까 말이다. 들뢰즈를 후기구조주의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생각해보라.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던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는 여러모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생각과 비교될 수 있다면, 개인을 넘어서는 구조의 필연성을 강조했던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구조주의는 스토아학파의 사유와 너무나 유사하다.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2009)

스피노자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를 비판적으로 종합했던 것처럼,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도움으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를 종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라 구조에 직면해 있는 자유, 혹은 구조를 넘어서려는 자유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연의 질서든 아니면 사회적 구조든 이걸 전제하지 않고 논의되는 자유는 공허할 뿐만 아니라,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들뢰즈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나 들뢰즈의 방식으로 꿈꾸지 않으면, 일반 사람들도 삶의 기쁨을 증진시키는 자유를 현실에 관철시킬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수정해야 할 것이 있다. 스피노자도 그렇지만 들뢰즈에게 스토아학파의 정신과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신은 동등하게 종합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종합에서 핵심은 에피쿠로스학파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유해도 좋을 듯하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신이 주인공이라면, 스토아학파의 정신은 주인공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이나 혹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관철하기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적 한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극복될 현실이 없는 이상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고, 이상이 없는 현실주의는 체념의 허무주의로만 남을 뿐이다. 스피노자나 들뢰즈의 종합은 백일몽과 체념이란 양쪽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고 능선을 건너려는 신중한 시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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