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1492년은 매우 특별한 해였다.
하나의 체제가 종말을 맞이했고 이전과는 다른 새 질서가 시작되었다.
스페인 땅 안달루시아를 다스리던 이슬람왕조가 그 세력이 약해지면서 영토가 조금씩 줄어들어 급기야 그라나다 왕국만 남게 되었는데, 1492년에 그마저도 망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스페인 왕국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이로서 뛰어나게 문화와 학문의 꽃을 피웠던 콘비벤시아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1492년은 또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유럽 문명이 세계 흐름의 주도권을 쥐게 된 계기를 연 해이기도 하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콘비벤시아와는 먼 정책으로 세계 각지를 정복해 가기 시작했는데, 문명의 탈을 쓴 야만적 약탈 행위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침탈의 선봉에 때때로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고 참담함을 느낀다.
그라나다는 한 시대의 마직막을 간직한 도시가 되었고 세비야는 한 시대를 연 도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13년 11월 18일 오전, 론다와 작별하고 바로 그 그라나다로 향한다.
론다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길은 론다로 오던 길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건조해 보이는 야산에 올리브 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심어져 있는 모습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한참을 달리니 멀리 정상에 눈을 잔뜩 얹고 있는 거대한 산줄기가 보인다. 바로 '시에라네바다' 산맥이다. 그라나다가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 정상의 눈은 11월에 벌써 내린 눈인지, 지난겨울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신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라나다는 생각보다 꽤 큰 도시이다. 중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근대 이후의 건물들이 즐비한 시내 중심가는 사람들의 통행으로 분주하다.
호텔에서 알함브라까지는 걸어가도 될 거리. 골목길로 이어진 언덕을 이리저리 돌아 가면 꿈에 그리던 알함브라 궁전이 있다. 사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바로 알함브라를 보는 것이다. 언덕 골목길이 정갈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걸어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알함브라 입구 매표소,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둔 터라 길게 줄 서서 기다리지 않고 입장권을 받을 수 있었다. 입장하기 전, 매표소 바로 옆에 있는 스낵바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알함브라 내에서의 관광 코스를 확인해 본다.
주요 관광 포인트는 옛 요새인 알카자르, 알함브라 분위기에는 약간 생뚱맞은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찰스 5세 궁전, 알함브라의 진수이자 그 자체인 나스르 궁전, 정교하고 아름다운 궁전 정원이다. 입구에서 느린 걸음으로 알카사바로 향한다. 옛 건물들이 폐허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정원수 틈으로 멀리 정감 있는 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알카사바까지 그리 길지 않은 통로에 Photo Point가 너무 많다.
알카사바는 알함브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건축물이다. 천 년 이상이 훌쩍 넘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요새의 필수 시설 전망탑이 시선을 끈다. 누대 위로 올라가니 그라나다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멀리에 시에라네바다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쌓여 있는 돌무더기 위에 앉아 그곳에서 생활했을 옛 병사들을 생각해 본다. 알함브라는 오래된 건물인 만큼 그 안에 쌓인 스토리도 많을 것이다. 음미하며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찰스 5세 궁 내부를 잠깐 보고 나스르 궁으로 향한다. 그 명성만큼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알함브라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이슬람 왕조의 궁전, 따라서 나스르 궁은 스페인 내에 있는 이슬람 건축의 정수이다.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대학 초년생 이후 무려 삼십오 년을 기다렸던 것이다.
나스르에서는 이슬람 문양, 아라베스크를 원 없이 볼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철저히 어떠한 상징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물, 특히 종교시설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에 그림이나 조각이 없으면 얼마나 심심하겠는가. 그래서 발달한 미술 양식이 기하학적 무늬가 끝없이 반복되는 '아라베스크'이다. 아라베스크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상상력과 지적 능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알 수 있다. 나스르는 기둥, 벽, 천정 그 어디에도 아름답고 현란한 아라베스크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어로 '아라야네스 정원'이라고 부르며 '도금양(식물의 이름)의 정원'이라고 해석되는 중정에 들어선다. 바로 이 곳이다. 35년 전 나의 시선을 얼어붙게 한 사진 한 장, 작은 분수에서 이어지는 수조, 그 잔잔한 물 위에 비치는 건물들의 실루엣, 그리고 조화로운 배경을 이루고 있는 건너 편의 건물, 사진 한 장에서 건축적 아름다움을 깊이 느꼈던 그곳,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다짐했던 바로 그 공간에 발을 디딘다. 건축의 대가들이 충분히 이 공간에 대해 언급했을 터, 하찮은 내가 그 말들에 하나를 더할 필요가 없다. 그저 바라만 볼뿐이다. 사진 촬영 기술이 아직 미흡하여 실제의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적당한 앵글을 잡지 못한 것은 핑계일 뿐이다.
좁은 통로를 지나 '사자의 정원'으로 간다. 알함브라 나스르는 규모의 장대함으로 사람들을 감탄시키지 않는다. 공간 구성의 치밀함과 디테일의 섬세함으로 그 매력에 빠지게 한다.
사자의 정원은 아라야네스 정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 그 정원을 둘러싼 회랑들의 기둥에 새겨진 문양들이 시선을 압도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균형 잡힌 건물들과 정원의 공간 구성이 훌륭하다. 이런 공간을 설계한 사람은 분명 천재였을 것이다.
나스르는 많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쓰임새가 다 다르다 보니 거기에 담긴 이야기도 많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 보려면 하루도 모자랄 나스르 궁을 빠져나온다. 밖에서 보는 나스르 궁은 검소하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별 볼 일 없는 '외화내빈'이 아니라 겉은 겸손하지만 속은 에센스로 가득 찬 외유내강형 건축물이다.
분수와 물길이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고 알함브라 투어를 마친다. 어느덧 해가 많이 기울었다. 35년간 가슴에 담았던 소원 한 가지를 이룬 소중한 날이 저물어 간다.
저녁 식사 후에는 플라멩코 공연을 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