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그라나다의 밤
2013년 11월 18일, 아쉬운 하루의 해가 저물었다.
저녁 식사 후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 플라멩코 공연장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투어 형식의 공연 관람을 권한다. 미니버스로 픽업해 주고, 관람 후에는 그라나다 야경 투어도 제공한단다. 어차피 낯선 도시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다소 비싼 듯한 요금을 치르고 미니버스에 탑승. 한국인 승객이 두세 팀 보인다.
차량은 오래된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 어느 공연장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허름해 보였지만, 좋은 공연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보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예술이다. 춤과 기타 반주가 열정적으로 어우러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나타낸다고 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고유의 플라멩코는 그 리듬의 독특함으로 인해 세계 각지의 현대 대중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공연이 끝났다. 동영상을 촬영하느라 스냅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플라멩코 관람 후기는? 글쎄... 처음 보는 플라멩코 공연이고, 게다가 나는 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겉으로 보기에 열정적인 춤사위에도 불구하고 그저 쇼윈도 안에 있는 마네킹을 본 느낌이랄까? 전통 공연장이 아닌 관광객을 위한 공연의 한계일 수도 있는, 그저 형식적인 몸짓만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반주와 노래와 춤을 제공한 출연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비야의 전통 플라멩코 공연을 봤어야 했다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미니버스는 우리를 어느 언덕 위 마을의 공터로 안내한다. 달빛 아래에서 알함브라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야경을 본 순간, 플라멩코 관람 후의 약간 아쉬웠던 감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달빛 아래에서 조명등의 도움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알함브라. 천년의 세월 동안 수 없이 많은 보름달이 떴다가 지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그 알함브라를 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 생각 저 생각 중에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고 다음에 꼭 같이 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이제 스페인에서의 밤도 두 번 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작별이 멀지 않은 밤이다. 객지에서 달빛이 교교한 이런 밤에는 시라도 한 수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쓸 재주가 없으면 옛 시인의 한 구절을 외우기라도 해야 한다. 그러기에도 내 기억력은 너무나 짧다. 여행기를 정리하며 책을 펴 본다.
五更燈燭照殘粧 새벽녘 등불이 남은 화장 비추는데
欲話別離先斷腸 이별을 말하려니 애가 먼저 끊어지네
落月半庭推戶出 달도 다 진 새벽녘에 문 열고 나서려니
杏花疎影滿衣裳 살구꽃 성근 그림자 옷깃에 가득하다.
'정포'라는 분의 [정인과 작별하다]라는 한시이다.
예고된 이별이든 갑자스런 이별이든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법, 스페인과의 이별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